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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 (화)

[이대근 칼럼]통일은 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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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반도에서 통일 의지를 불태우는 건 윤석열 정부뿐이다. 북한은 이미 남한과 통일하지 않겠다고 했다. 남한 시민들은 2023년 통일연구원 통일의식 조사에서 46.1%가 ‘통일 필요 없다’고 응답했다. 응답자는 보통 이런 설문에 자기 개인 판단보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대답을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편향을 제거하기 위해 평화공존과 통일 가운데 선택하도록 하자 평화공존이 59.5%, 통일이 22.5%였다. 젊은 세대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에서 평화공존 선호가 압도적이다. 그러든 말든 윤석열 정부는 ‘자유의 북진’이니 ‘통일독트린’이니 하며 들떠 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통일은 민족의 구원이었다. 반민주, 인권탄압, 빈부격차, 정경유착과 부패 같은 한국 사회의 모순은, 분단이라는 단 하나의 원인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남한은 불구화된 체제다, 남한만으로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통일 환원주의, 통일 메시아주의였다.

하지만 남한 스스로 산업화, 민주화, 선진화를 성취했고, 통일은 손익을 따져봐야 하는 비즈니스로 변했다. 값싸고 풍부한 인력, 부동산, 자원이 통째로 굴러오는 횡재로 계산이 이미 끝났다. 통일의 세속화이자 통일의 재발견이다.

이런 관점은 여야가 크게 다르지 않다. 임종석이 통일 아닌 두 국가로 살기를 제안하자 한동훈·정동영은 한목소리로 북한 붕괴 시 남한 개입 근거가 사라진다며 반대했다.

대부분 남한 사람은 통일을 ‘북한 붕괴, 남한에 의한 흡수’로 생각한다. 민중봉기나 쿠데타가 발생해 중앙정부가 붕괴하고, 무정부 상태가 올 거라 상상한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 붕괴와 같은 결말을 예상하는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는 민중의 불만과 저항이 아니라, 일부 개혁으로 불만을 해소해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 때문에 무너졌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북한은 초중앙집권화 체제를 흔들림 없이 유지할 것이다. 급변 사태? 기대할 게 못 된다.

설사 김정은 정권이 무너진다 해도 다른 정권으로 교체되거나 과도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 극히 낮은 확률로 쿠데타·민중봉기에서 중앙정부 붕괴까지 모든 예외적 사건이 우연히 연이어 발생해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국제법상 엄연한 주권국가다. 그곳에 2600만명의 주권자가 있고, 그들의 영토가 있다. 북한은 그들의 것이다. 남한이 이들 의사에 반해 북한을 소유할 정당한 권리가 없다. 북에 군대를 파견하면, 침략행위가 된다.

외부세계가 북한에 관여할 수 있는 계기는 대량학살과 같은 인도주의적 위기가 임박했을 때 북한 인민 요청으로 유엔 안보리 결의를 통해 국제사회가 인도적 개입을 하는 경우뿐이다. 2011년 리비아 사태 때 유일한 전례를 남겼지만, 그런 일이 북한에서 반복되리라 장담할 수 없다. 국제사회 개입은 중·러 반대로 무산될 수도 있다. 만에 하나 유엔 결의가 이뤄진다 해도, 남한이 국제사회 일원으로 활동할 수는 있어도 북한을 독차지할 수는 없다. 북한과 적대관계라면 말할 것도 없다. 붕괴·흡수통일의 꿈, 깨는 게 좋다. 통일을 원한다면, 다른 통일을 추천한다.

요즘 임종석 제의를 계기로 북한이 이미 포기한 통일 지향의 특수관계를 남한만이라도 고수할지, 두 국가 관계로 갈지 갑론을박 중이다. 중요한 것은 관계의 이름이 아니라, 관계의 실체다. 김정은의 선언이 아니더라도 지금 남북은 적대적 두 국가 관계라는 현실에 직면했다. 통일할지 말지 따질 상황이 아니다. 통일론 부상은 언제나 불길한 징조였다.

남북 대화에 실패한 대통령들은 실패를 은폐하려 통일론을 띄웠다. 윤석열만이 아니다. 박근혜는 통일대박이라며 통일준비위원회까지 운영했고, 이명박은 통일이 도둑처럼 온다며 일제 치하 독립자금 모금하듯 통일자금 모금을 한다며 ‘통일항아리’ 운동을 했다.

통일론이 유령처럼 갑자기 나타나 헷갈리게 할지라도 정신 차려야 한다. 통일론은 평화부재를 먹고 자란다. 우리가 할 일은 적대적 관계를 평화적 관계로 전환하는 것이다.

보수 대통령이 통일론 띄우기로 일탈을 할지라도 양당 정부의 대북정책 기초는 여전히 김대중의 ‘선 평화 후 통일’이다. 남북 간 평화가 진전되고 공고해지면 두 국가 관계인지 아닌지가 무슨 상관인가? 더 나은 평화 상태의 결과가 통일이라면, 통일이 평화의 다른 이름으로 온다면, 평화냐 통일이냐가 무슨 소용인가?

무조건 평화가 우선이다. 평화에 집중해야 한다. 통일은 잊자.

경향신문

이대근 칼럼니스트


이대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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