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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허세인가 패션인가… ‘가짜 수하물 스티커’ 붙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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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공항서 자존감 높이기?

과시욕 노린 틈새 상품

“100% 리얼리티, 절대 티 나지 않습니다.”

짝퉁을 소개할 때 쓰이는 상습적인 표현이지만, 이 제품은 조금 의아하다. “캐리어(짐가방) 새로 샀는데 허전하신가요? 허전해서 여행 초보 같아 보이세요? 당신의 캐리어를 더욱 가치 있게, 럭셔리하게.” 그렇다. 공항에서 짐 부칠 때 항공사 직원이 캐리어에 붙여주는 ‘수하물 스티커’를 파는 온라인 상점이 등장한 것이다. 물론 가짜. 과시욕을 노린 틈새 상품답게 대부분 ‘인천~파리’ 같은 장거리 노선이 인쇄돼 있다. “아시아나항공 등 국적사의 다양한 디자인, 뉴욕·로스앤젤레스·두바이 등 유명 도시 표기, 항공사 코드까지 신경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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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용 캐리어 겉면에 가짜 수하물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네이버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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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은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행위다. 길이 5㎝ 남짓한 이 작은 스티커 쪼가리가 캐리어에 수십 장 붙어있다는 건 ‘나 돈깨나 있다’는 소리 없는 아우성인 셈이다. 가짜 수하물 스티커에는 좌석 등급(비즈니스)이나 특별 회원(GOLD) 여부 등이 함께 표기돼 허세를 부풀린다. “캐리어 소유자의 품격까지 생각했다”는 슬픈 호객. 가격은 스티커 30여 장에 1만원 수준이다. 단돈 1만원으로 대략 1억원어치 항공료를 쓴 부자 행세가 가능한 것이다. 한 구매자는 “스티커를 붙이니 나름 여행도 많이 다녀온 것 같고 더 패셔너블한 느낌”이라는 후기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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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온라인에서 판매 중인 '가짜 수하물 스티커'. /네이버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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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퉁을 사는 이유는 하나, 진짜를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최대한 진짜처럼 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포르쉐·페라리 등 ‘가짜 외제차 열쇠’(중국산)를 파는 온라인 마켓도 생겨났다. 자동차 굴릴 돈은 없어도 남들에게 수퍼카 차주(車主)로 보이고 싶은 허영심을 노린 것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실제로 돈이 많으면 몸을 사리지 결코 타인의 시선을 끌기 위해 유난을 떨지 않는다”며 “정신적 가난과 미성숙을 드러내는 행태일 따름”이라고 말했다.

가짜 수하물 스티커는 의미 없는 그림일 뿐이지만 ‘진짜’ 캐리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특히 소규모 공항에서 오배송 확률이 커진다고 한다. 인천국제공항공사 관계자는 “수하물 분류 시 일반적으로는 ‘러기지 태그(캐리어 손잡이에 감아주는 긴 스티커)’ 바코드를 주로 활용하기에 스티커는 보조용이긴 하지만 일부 공항에서는 둘을 대조 비교하는 더블 체크가 이뤄진다”며 “스티커가 여러 장 붙어 있으면 시스템 오류를 일으킬 수 있어 과거의 스티커는 캐리어에서 꼭 떼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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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증샷을 위해 공항 검색대 트레이에 올려둔 명품 소지품.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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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은 익명의 여행자가 오가는 공간, 소지품으로 자신의 수준을 자랑하고 싶은 욕망을 자극한다. 최근 Z세대 사이에서 ‘공항 검색대 소지품 인증샷’이 유행하는 배경이다. 보안용 엑스레이 검색대 앞에 놓인 회색 플라스틱 트레이(tray·통)에 명품 가방 등 고가의 패션 아이템을 예쁘장하게 배치한 뒤 인증샷을 찍어 소셜미디어(주로 틱톡)에 올리는 것이다. 일종의 작은 패션쇼. 일각에서는 “삶을 큐레이팅하려는 욕구”이자 “일상의 예술”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이 놀이가 ‘공항 트레이 미학(Airport Tray Aesthetic)’으로 불리는 이유다.

붐비는 장소에서 인증샷에 열중하는 무리가 늘수록 원성은 높아지고 있다. “이로 인해 누군가는 항공편을 아예 놓치게 될 수 있다”(미국 뉴욕포스트) “공항에서 가장 미움받는 사람이 될 위험이 있는 불안한 트렌드”(영국 메트로)라는 지적도 나온다. 뭇 네티즌은 “너무나 물질주의적 풍경” “누군가 새벽 5시에 지갑과 립글로스 같은 물건을 가지런히 놓느라 검색대 앞에 멈춰 있다면 미쳐버릴 것 같다” “JFK공항에서 이런 행동을 한다면 테이저건을 맞을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남겼다.

[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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