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저 자원을 두 나라 이상이 공동 개발한다는 발상은 1969년 (유럽) 북해 대륙붕 분쟁 사건에 대한 국제사업재판소 판결에 의해 제기된 바 있으나, 실제 실천에 옮기게 되는 것은 한일 간 대륙붕 협정이 처음이다.” 1978년 1월 8일자 동아일보는 ‘세계 최초의 석유 공동개발’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그해 6월 한일공동개발구역(JDZ) 협정 발효로 개발이 시작되는 ‘제7광구’의 의미를 이렇게 소개했다.
▷어제 한일 정부가 JDZ 협정에 따른 6차 한일 공동위원회를 도쿄에서 개최했다. 1985년 5차 회의 때 만난 후 39년 만에 마주 앉은 것이다. 협정은 발효로부터 50년이 지난 2028년 6월에 종료된다. 자동 종료 시점으로부터 역산해서 3년 전인, 내년 6월부터는 양국 중 어느 쪽이라도 종료를 선언할 수 있다. 협력을 계속할 생각이 있다면 양국이 더는 협상을 미룰 수 없는 시점이다.
▷제주도 남쪽 200km 바닷속 7광구가 처음 주목받은 건 1969년 유엔 아시아극동경제개발위원회가 관련 보고서를 펴내면서였다. 이 보고서는 “한국 서해와 동중국해 대륙붕에 바다 기준 세계 최대 매장량의 석유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이듬해 박정희 정부는 발 빠르게 7광구에 대한 영유권을 선포했다. 수심 200m 이내의 대륙 연장부인 대륙붕이 어느 나라 땅에 연결됐느냐에 따라 개발권을 부여하던 당시 국제법은 한국에 유리했다.
▷1973년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 회원국들은 ‘욤키푸르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한 서방을 상대로 석유 금수조치를 개시했다. ‘1차 오일쇼크’다. 배럴당 3달러였던 국제유가가 12달러로 뛰었다. 거리만 보면 한국보다 7광구에 가까운 일본은 마음이 급해져 강하게 권리를 주장했다. 자원을 개발할 기술, 재원이 부족한 한국은 1974년 공동 개발을 결정했다.
▷한국석유공사와 일본석유산업단이 1978∼1987년, 2002년 두 차례 7개 시추공을 뚫는 등 공동 탐사를 벌였지만 경제성 있는 유정을 찾지 못했고, 일본은 소극적 태도로 돌아섰다. 탐사·시추를 공동으로 해야 하는 조항 때문에 한국도 발이 묶였다. 1982년 바뀐 국제해양법이 200해리 배타적경제수역(EEZ)을 인정하는 등 거리 중심으로 바뀌면서 7광구 상당 부분이 일본에 귀속될 가능성이 커지자 고의로 개발을 미룬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하지만 협정이 종료되더라도 7광구는 한일 대륙붕이 중첩되는 곳이어서 상대국 동의 없는 일방적 개발은 어렵다. 게다가 중국은 한일 협정 초기부터 7광구가 중국에서 뻗은 대륙붕이라는 주장을 펴며 인접 지역에 시추공을 뚫고 있다. 한국과 일본이 마음을 열고 7광구를 협력의 장으로 키워 내지 못하면 괜히 주변국 좋은 일만 시킬 수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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