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독립시대' 포스터(왼쪽)과 구스타프 클림트의 'Fulfillment'(1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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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 왼쪽이 ‘독립시대’ 포스터고, 오른쪽이 클림트의 ‘Fulfillment’(1905)입니다. 우리말로는 ‘충만’. 클림트는 ‘키스’가 워낙 유명해서 성적인 뉘앙스가 강한 화가로만 알고 계실 수 있는데, 제 생각에 클림트는 긴장과 자극보단 평안과 안식을 그릴 때 더 빛났던 화가입니다. 저 여인의 얼굴. ‘이제 다 되었다, 다 되었어.’ 그렇게 말하는 거 같지 않으신가요. 그림 제목 진짜 잘 지었죠. 반면에 ‘독립시대’ 포스터는 다른 선택을 합니다. 정확하게는 에드워드 양의 선택이죠. 두 남녀의 저 모습이 영화의 매우 결정적인 장면인데요. 여자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둘은 좋아서 껴안은 것 같기도, 혹은 울다가 끌어안은 것 같기도 하죠.
저 남자의 등은 어찌 저리 아련한지. 아마도 옥스포드 셔츠 때문인 것 같아요. 만약 남자가 디올이나 생 로랑 자켓을 입었다면 지금의 저 느낌이 안 났을 거거든요. 서울 어디 유니클로 매장에도 걸려있을 법한 옥스포드 셔츠의 등 뒤로 배어나오는 슬픔 혹은 기쁨은 지극히 일상적이라 만져질 듯 하네요. 저 포옹의 비밀은 영화 마지막에 드러납니다. 궁금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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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그리고 둘’에서 주인공 꼬마가 사진기를 들고 사람들 뒷모습만 찍던 거 기억하시나요. 평생 자신의 앞모습만 보고 사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뒷모습을 찍어 보여주겠다는 게 꼬마의 마음이었죠.
감독 에드워드 양이 영화를 하는 마음이 꼭 그랬을 듯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독립시대’에도 나타납니다. 제목 때문에 정치 영화인가 할 수 있는데, 아니요. 1990년대 대만 사회의 자화상, 그 시대를 살던 대만 사람들이 무엇을 욕망하며 그 욕망 때문에 무엇을 잃어버리고 살았는가, 잃어버린 후에야 알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질문이 살아있는 영화입니다. 스스로는 알 수 없고, 남이 보여줘야 볼 수 있는 뒷모습 같은 거죠. 지금 우리 모습과 매우 비슷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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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작하고 한 10분은 정신을 집중하셔야 합니다. 비중이 엇비슷한 인물이 10명쯤 나오는데 누가누군지 파악하는데 시간이 걸리거든요. 대사로만 관계를 알 수 있는데 대사량이 꽤 많아요. 다들 혈연 지연 학연으로 얽혀 있고,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해요.
줄거리 제일 앞에 선 인물이 다름아닌 공자입니다. 공자 가라사대 할 때 그 공자. 영화 시작하자마자 자막이 흐릅니다. ‘공자께서 위나라에게 이르러 백성들이 많구나 하셨다, 그럼 어찌할까요, 제자가 물으니 부유하게 해줘야지라고 했다. 부유해지고 난 다음에는 어찌할까요?’ 여기에 대한 답은 안 나오고 바로 뒤 자막으로 이어집니다. ‘2000년 동안 가난과의 투쟁을 뒤로하고 타이페이는 불과 20년 만에 세계 부자 도시로 거듭났다.’ 자, 감독은 묻습니다. 부유해진 도시에서 욕망을 좇는 이들은 어찌해야 하나. 감독이 보기에 부(富)와 함께 번식하는 주적은 가식입니다. 잘 사는 척, 행복한 척, 사랑인 척. 가식의 가면을 쓰고 대하게 되죠. 이 가식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답을 찾아보라고 관객에게 계속 실마리를 던져주는데요.
그 중 하나가 이 영화의 영어 제목에서 드러납니다. ‘A Confucian Confusion’, ‘공자의 혼란’입니다. 영화 속 소설가가 쓴 소설 제목이기도 한데요, 무슨 내용인고하니, 공자가 현대에 환생했는데 사람들이 엄청 좋아해요. 어안이 벙벙해진 공자. 알고보니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사기를 잘 치는지 알려달라”고 하네요. 사실은 믿지 않았던 거죠. 드러나는 것과 내재된 것, 말하는 것과 말해지는 것 사이에 간극이 생기고, 그 간극의 틈을 물질의 발달, 가치의 실종이 자꾸 벌리고. 그걸 상징하는 인물로 공자를 내세운 거죠. 중간중간 공자 말씀이 나와요.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못 산다”는둥,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있어선 안 되고 대비하는 맘이 없어서도 안 된다”는둥. 상황에 잘 달라붙지 않는 그럴듯한 가르치심은 길 잃고 갈 곳 없는 공자의 처지를 말해주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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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는 감독이 비 맞은 중처럼 혼자 중얼중얼하다 끝나는 경우가 있는데, ‘독립시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감독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인물의 입을 빌려서 분명하게 말해주거든요. “가식과 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죽음이 아니라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면서 강조해요. “진리가 사방에 있는데 공자가 왜 필요하고, 왜 흉내내면서 살아야해요.” 물론 쉽지 않습니다. 척 하고 사는 게 훨씬 쉽고 편하니까요. 멀리 갈 것도 없죠. 인스타그램만 봐도 척 하는 사람들과 척 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 척 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을 따라하는 사람들로 넘쳐나지 않나요.
감독이 영화 만드는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드러내는 부분이 있는데요, 내내 예술과 감정이라는 단어가 쌍으로 등장합니다. “예술가는 유혹을 잘하고, 함정을 파. 쉽게 속아넘어갈 수 있으니 조심해” “자기는 너무 감정적이야, 예술가들하고 너무 오래 일했나봐” “예술가들은 돈과 감정에 대해 잘 알아요” 등등. 마치 감정이라는 것이 위험하고 비본질적이라는 듯 말하지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그 반대죠. 결국 예술가들이 뿌려놓은 감정의 씨앗이 세상을 움직이니까요. MBTI로 치면 대문자F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T들은 F에 포박돼 조종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라는 장르가 대표적인 F의 장르 아니겠습니까. 그 어떤 막강한 T라도 어느 순간엔 흔들리고야 맙니다. 눈물 쪽으로든 웃음 쪽으로든. (저 F 아닙니다. T입니다, 대문자T.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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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오늘의 레터 제일 앞에 말씀드렸던 포옹의 순간에 이릅니다. 아마 그 장면을 보시고 나면, 담부터는 엘리베이터 문이 여닫히는 순간마다 알 수 없이 설레게 되실지도 모르겠어요. 전 이제까지 엘리베이터하면 “드루와, 드루와”하며 피 철철 칼침 맞던 황정민(신세계)이나, 승냥이처럼 달려들어 숨통을 끊어놓던 손석구(범죄도시2)가 떠올랐는데, ‘독립시대’ 덕분에 피 말고 커피를 떠올리게 됐어요. 응, 무슨 커피? TGI프라이데이에서 파는 커피요. 응?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 아, 영화를 직접 보시고 느끼시라고 여기선 자세히 설명드리지 않을게요. 보시고 나면 내내 환하게 따스해질 한순간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준비됐다는 것만 말씀드리며~ 저는 다음 레터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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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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