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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목)

[광화문에서/이은택]피해자도 가해자도 노인… 짙어지는 고령화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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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이은택 사회부 차장


영화 ‘은교’에서 박해일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요즘 벌어지는 현실은 노인들에게 가혹하다. 특히 60대 이상은 ‘고령층’이란 카테고리로 한데 묶이는데 이들이 사건 사고에서 언급될 때마다 비난 댓글이 넘친다.

7월 벌어진 서울 시청역 역주행 참사의 가해 운전자 차모 씨가 1956년생, 신문 나이로 68세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먹먹했다. 기자의 아버지와 동갑이었다. 차 씨는 자신이 가속 페달이 아닌 감속 페달을 밟았다고 철석같이 믿었지만 그의 신발 자국은 가속 페달에 남아 있었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조사 결과 ‘여러 번’ 밟은 것으로 확인됐다. 평생 운전을 업으로 해왔고 ‘운전 베테랑’이라고 불렸던 차 씨는 황혼의 나이에 운전 미숙으로 9명을 숨지게 한 가해자가 됐다. 그가 왜 가속 페달을 밟았는지는 아직도 이유를 모르지만, 이미 여론은 그의 ‘고령’을 원인으로 결론지었다.

이후 ‘고령’은 핫한 키워드가 됐다. 8월에는 60대 여성이 테슬라 전기차를 몰다 페달 조작 실수로 카페를 들이받았다. 이달 13일에는 서울과 부산에서 각각 70대 운전자가 돌진 사고를 냈고, 부산에선 행인 1명이 숨졌다. 이달 20일에도 서울 강북구 미아동, 경기 고양시, 경기 용인시에서 70대 운전자들이 몰던 차량이 돌진해 사상자가 나왔다. 사망자 2명을 포함해 사상자 8명이 나왔다. 그때마다 ‘나이’를 지목하며 ‘역시나’ 하는 반응이 이어졌다.

다시 68세 시청역 차 씨, 그는 고령일까. 솔직히 어렵다. 동갑내기 인사들을 찾아봤다. 미국 배우 톰 행크스와 멜 깁슨, 탤런트 유동근, 임태희 경기도교육감, 현역 정치인 최춘식 김성기, 조배숙 국민의힘 의원. 모두 1956년생이다. 차 씨 사건 이후 65세 이상은 면허를 제한해야 한다, 회수해야 한다 등 의견도 있었는데 위 동갑내기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행크스는 요즘 신생 업체가 생산한 박스형 소형 전기차를 몬다고 한다.

‘고령’은 다른 한편에선 피해자의 이름이다. 앞에 언급한 고양시 사고의 사망자는 차로에서 폐지 손수레를 끌던 60대 노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폐지 손수레를 끄는 노인은 1만4800명이 넘는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손수레 노인과 동행했을 때 여러 번 눈앞에서 위험을 목격했다. 운전이 미숙한 고령의 가해자가 생계를 위해 수레를 끌던 고령의 피해자를 치어 숨지게 하는 기막힌 상황의 밑바닥에는 고령화사회의 그림자가 짙다.

이 같은 사건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65세 이상 고령 운전자가 낸 교통사고는 총 3만9641건으로 2005년 이후 가장 많았다. 고령 운전자가 낸 사고는 치사율(2.1%)도 전체 교통사고 평균(1.4%)보다 높다. 공유 자전거, 공유 킥보드, 차량공유 서비스에 익숙해진 젊은 층은 점점 운전면허와 ‘내 차’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 그사이 고령 인구는 꾸준히 늘 테고 노인이 서로 피해자와 가해자로 직면하는 사건 사고도 늘어날 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은 노인 교통사고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 부착을 의무화할 예정이다. 우리도 늦기 전에 정부와 국회의 대책 논의가 필요하다.

이은택 사회부 차장 na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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