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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목)

대다수 학생을 실패자로 만드는 ‘상대평가’는 위헌이다 [왜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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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24학년도 수능일인 지난해 11월16일 오전 광주의 한 고등학교 고사장에서 수험생들이 시험 시작 시간을 기다리며 공부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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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기고 ‘변호사들의 교육 이야기’ ⑥



박다혜 | 변호사



학창시절 시험이 끝난 뒤 속상한 마음에 “아는 문제인데 실수로 틀렸어요”라고 선생님께 하소연하였다. 그때 선생님은 진지한 얼굴로 “실수도 실력이야. 1점 차이로 대학을 붙고 떨어지는데 절대 실수가 없도록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셨다. 어린 마음에 억울하고 부당한 마음이 들었지만 선생님이 누구보다도 우리를 걱정하고 안타까워하신다는 마음이 느껴졌고, 이것은 선생님도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막연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학창시절의 우리는 ‘상대평가’라는 거대한 산맥 앞에 좌절감과 패배감을 안고 마주 서야 했다.



다른 학생의 성적과 비교해 집단 내 상대적 위치로 그 학생의 능력을 평가하는 상대평가는 개별 학생이 절대적 기준에 비춰 얼마의 성취를 보였는지 평가하는 절대평가와 대별된다. 현행 대학입시제도는 영어를 제외하고는 상대평가를 택하고 있고, 학교생활기록부 역시도 표준편차, 석차(동석차수)를 표기하여 상대평가를 택하고 있다.



그 선생님의 말씀처럼 한 문제만 (실수로) 틀려도, 상대주의 평가 체제에서는 이것이 아주 유의미한 변별의 근거가 되고, 진학에도 영향을 준다. 실수하지 않는 누군가가 있는 한, 나의 실수는 패자의 변명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이는 ‘결과’로만 오로지 나의 ‘과정’을 증명할 수 있다는 가치관을 심어주기도 한다. 선생님은 당시 우리에게 이와 같은 비정한 현실을 알려주신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조너선 거슈니 영국 옥스퍼드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의 입시경쟁을 냉전시대의 끝없는 ‘군비 경쟁’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상대평가는 내가 어떤 실력과 능력을 갖추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했더라도 상대가 나보다 1점이라도 더 획득한다면 나는 전장에서 패배하게 되기에 끊임없이 미지의 두려움에 떨면서 군비를 비축해야 한다. 이때 가장 큰 문제는 경쟁하다가 더는 버틸 수 없는 시점이 오는데, 이때 상대가 좀 더 버텨서 이기면 상대는 승자가 되고, 나는 패배자가 된다. 내가 또는 나의 부모가 충분한 능력을 쌓지 못해서 패배했다고 원망하고 자기혐오에 빠진다. 능력에 대한 판단 기준이 선망하는 대학에 들어갔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에 입시에 실패하면 곧 능력이 없고, 불성실한 사람 같이 느껴지는, 자기 스스로의 가치에 대한 도덕적 평가로까지 이어진다.



이전 세대는 자신이 처한 시대와 상황의 한계 때문에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세계적 실력을 키운다는 일념으로 경쟁 교육을 감내하였다. 어쩌면 우리 부모님들은 정말 살아남기 위해, 더 좋은 세상을 맞이하기 위해 감내한 일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일시적으로 ‘용인’하였던 경쟁 교육이 이제는 우리 발목을 잡고 있다. 현재의 상대주의 체제에서는 극단적 일부만 승자가 되고 나머지는 모두가 패자가 된다.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패배감을 안고 살아가는 사회는 결단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세상은 바뀌었다. 더 늦지 않게 우리 모두 개개인의 잠재역량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는 교육으로 바꿔야 한다.



2022년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이런 현행 상대주의 체제 입시제도가 우리가 추구하는 헌법적 가치에 정면으로 반함을 주장하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우리는 비정한 사회를 이렇게 감내했지만, 이제는 그 사회를 달리 살아갈 방법이, 또 능력이 생겼음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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