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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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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로 치면 소총 한 자루도 못 만드는 처지죠”···보건 전문가가 본 한국의 ‘보건 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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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권준욱 연세대 보건대학원 연구교수가 지난 20일 연세대 보건대학원 교수 연구실에서 “자체 mRNA 백신 기술 확보 없이는 ‘신종 감염병X’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박용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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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감염병 발생 후 100일 안에 백신과 치료제를 확보해야 해요. ‘거리두기’가 4개월을 넘기면 사회 경제가 입는 타격이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치닫습니다. 겪어봐서 아시잖아요.”

지난 20일 권준욱 연세대 보건대학원 연구교수(59)는 백신과 치료제를 자체 개발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100일 안에 백신과 치료제 확보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자체 개발과 생산뿐이에요. 코로나19 당시 미국과 영국 등 백신 개발국들은 자국민에 물량을 우선 배정했어요. 그래서 한국 같은 나라들은 초기 백신 확보에 비상이 걸렸죠. 백신을 제때 확보하지 못해 대규모 인명피해까지 발생한 나라도 부지기수였잖아요.”

공중보건의 출신으로 30여년간 보건복지부에서 일했던 권 교수는 코로나19 팬데믹이 막 시작됐던 2019년 당시 복지부 대변인이었다. 이듬해부터 지난해까진 질병관리청 산하 국립보건연구원장과 중앙방역대책본부 부본부장을 겸임했다. 팬데믹 기간 정책 홍보, 방역 현장 지휘, 연구·개발(R&D) 분야를 누볐다. 그런 그가 당시의 경험을 책으로 냈다. <감염병X, 코로나 이전 세상은 다시 오지 않는다>이다. 일종의 ‘징비록’이다.

WHO는 지난해 5월 코로나19의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 그러나 지난달 코로나19는 재유행 조짐을 보였다. 지난 8월 초에는 WHO가 엠폭스(원숭이두창)에 대해 국제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미국과 호주에서는 신종 조류독감(조류인플루엔자)의 인체 감염 사례가 동시다발적으로 보고됐다.

권 교수는 “우리는 이런 상황에 대비가 돼 있지 않다. 코로나19를 겪었음에도..”라고 했다.

“기후변화로 인한 바이러스 서식 환경 확대, 노령화로 인한 면역력 약화, 세계화로 인한 전파 경로 확대 등으로 보다 치명적인 제2, 제3의 팬데믹이 닥치는 건 시간 문제에요. ‘자주국방’ 못지않게 ‘자주방역’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현재 ‘소총(백신)’ 한 자루도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수준이에요.”

실제 팬데믹 당시 한국도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착수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국내 굴지의 제약사가 기술 개발에 나섰지만 팬데믹 끝 무렵이 돼서야 겨우 완성했다. 개발한 기술 자체도 mRNA 백신이 아니라 이전 세대 기술인 합성항원 방식이었다. 합성항원 방식은 바이러스 변이에 신속 대응이 어렵고, 효과도 mRNA 백신에 비해 떨어진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개발한 기술을 상용화하기 위한 임상시험도 난관의 연속이었다. 관련 경험도 없었고, 관련 시설을 구하는 것조차 하늘의 별 따기였다. “신약의 정식 임상시험은 3만명 정도를 대상으로 해요. 당시 우리는 수십명을 대상으로 한 약식 임상시험도 벅찼어요. 전용 생물안전실험실(Bio Safety Lab) 같은 관련 시설조차 턱없이 부족했거든요. 그래서 이란이나 쿠바, 투르크메니스탄보다도 자체 백신이 늦게 나왔어요. 실용성은 사실상 없었죠.”

경향신문

권준욱 연세대 보건대학원 연구교수가 국립보건연구원장이던 2020년 초 국립보건연구원 생물안전실험실 앞에서 박민우 연구사와 대화를 하고 있다.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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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R&D’과 사실상 담을 쌓은 제약업계와 범정부 차원의 R&D 로드맵 부재를 주된 원인으로 꼽았다. “해외 제약사가 신약을 개발하면 국내 제약사들은 특허 기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이를 복제하는 데에만 치중했어요. 많은 비용과 노력, 또 실패의 위험이 따르는 신약 개발은 거의 시도조차 하지 않았죠. 수십 년 간 복제약만 팔아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오리지널 약’을 팔든 ‘복제약’을 팔든 똑같이 건강보험급여를 타갈 수 있는 수가 체계 때문이기도 하죠.”

그는 국내 제약사들이 신약 개발을 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산업 생태계와, 신약 개발 실패에 따른 충격과 부담을 완화해줄 수 있는 지원망을 동시에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또 보건복지부, 산업통상자원부, 식약처, 질병관리청,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부처별로 쪼개져 중구난방으로 진행되는 R&D 사업들을 통합해 중복 투자를 방지하고, 체계적인 성과관리를 실시해야 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보건 분야에서도 방위사업청에서 국방과학연구소, 방산 기업으로 이어지는 식의 기관 체계를 만들 필요가 있어요. 실제로 미국의 ‘NIH’(미 국립보건원)도 이와 유사해요.”

무엇보다 장기적이고 선제적인 투자가 중요하다고도 했다. “미국은 지난해 코로나19가 종식 선언되자 오히려 ‘프로젝트 넥스트제너레이션’을 시작하고 기술 개발에 50억 달러를 쏟아부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지난해 R&D 예산을 대폭 삭감했죠. 조선이 임진왜란을 치르고도, 병자호란 때 또다시 ‘삼전도의 굴욕’을 겪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박용필 기자 phi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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