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만에 전면전 가능성 커져
이스라엘군 공습 피해를 입은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건물 잔해에서 21일 실종자 수색과 구조 작업이 벌어지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20~21일 레바논 무장 단체 헤즈볼라의 본거지가 있는 베이루트에 공습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현재까지 최소 37명이 사망하고 헤즈볼라 ‘2인자’로 통하던 지휘관 이브라힘 아킬이 숨졌다. /신화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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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의 이슬람 무장 단체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간 40여 년의 악연이 전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커졌다. 헤즈볼라 조직원 등 3000여 명이 레바논 각지에서 죽거나 다친 지난 17~18일 대규모 무선호출기·무전기 폭발 공격 이후 이스라엘이 20·21일 연속으로 레바논 남동부와 수도 베이루트에 대해 맹폭을 가해 헤즈볼라를 다시 몰아붙이고 있다. 헤즈볼라 최고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가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을 천명한 가운데 이번 공격으로 헤즈볼라 내 서열 2위인 군사 지도자 이브라힘 아킬을 비롯해 고위 지휘관 열여섯 명이 사망하며 양측이 전면전을 더는 피할 수 없게 됐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미국은 레바논 내 자국 시민에게 ‘즉각 철수’를 명령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휴전을 중재하며 중동의 불안을 잠재우려 애써온 미국 등 서방권의 노력에 중동의 또 다른 전쟁이란 암운(暗雲)이 드리울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스라엘군은 21일 “전날 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남부 외곽의 다히예 지역을 표적 공습했다”고 발표했다. 이 공격으로 헤즈볼라의 특수전 부대 ‘라드완’의 지휘관 이브라힘 아킬과 부지휘관 아흐메드 와비 등 핵심 지휘관 10여 명이 사망했다고 이스라엘군은 밝혔다. 헤즈볼라도 피해를 인정했다. 공습받은 건물은 2층짜리 주거용으로, 이스라엘군 폭격에 내부가 완전히 파괴됐다. 알자지라는 “37명이 사망했고 이 중 어린이가 셋, 여성이 일곱 명”이라고 전했다. 다니엘 하가리 이스라엘군 수석대변인(소장)은 “헤즈볼라 최고 지휘관들이 이 건물 지하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 모의를 하고 있었다”며 이번 공격이 정당한 군사작전이라고 주장했다.
레바논 남부 조타르 마을 외곽에서 21일 밤 이스라엘 공습이 벌어지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이날 저녁 레바논에서 수천 개의 로켓 발사대와 기타 목표물을 공습했다고 발표했다. /AF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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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군의 베이루트 표적 공습은 올해 들어 세 번째다. 목표는 모두 달성했다. 이스라엘과 지난해 10월부터 전쟁을 벌이는 하마스(팔레스타인 이슬람 무장 단체)의 권력 서열 3위로 알려진 살레흐 알아루리를 지난 1월 무인기 공격으로 제거했고, 7월엔 헤즈볼라 군사 조직의 최고 지도자이자 나스랄라의 ‘오른팔’로 불리던 푸아드 슈크르를 미사일 공격으로 폭사시켰다. 지난 20일 사망한 아킬은 이후 슈크르의 역할을 대신해 왔다고 알려졌다. 그는 미 군사·외교 역사상 최악의 비극 중 하나로 꼽히는 1983년 베이루트 미 대사관 폭파 사건 및 같은 해 미 해병대 막사 폭파 사건의 핵심 주동자다. 최대 700만달러(약 93억원) 현상금이 걸린 인물이기도 했다.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아킬 사망 후 “미국인을 살해한 테러리스트에게 정의가 구현되는 것은 좋은 결과”라고 말했다.
이번 이스라엘의 공격은 과거 ‘표적 제거 작전’에 비해 규모가 훨씬 큰 데다, 레바논 전역에서 벌어진 초유의 호출기·무전기 동시다발 폭발이 일어난 지 한 주도 되지 않은 시점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스라엘은 베이루트 표적 공격 외에도 레바논 남부 및 동부의 헤즈볼라 군사 시설에 대한 폭격을 퍼부었다. 20~21일 양일간 100여 차례 공습을 통해 헤즈볼라의 미사일 발사대 수백 대와 여러 군 시설이 공격을 받았다. 월스트리트저널 등은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의 전쟁 수행 능력 무력화에 나선 것”이라고 분석했다.
헤즈볼라는 이에 맞서 22일 새벽 이스라엘 북부의 항구 도시인 하이파 지역에 로켓 100여 발을 발사해 보복에 나섰다. 헤즈볼라는 “하이파에 위치한 군수 시설을 공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스라엘은 이에 “헤즈볼라에 추가 공습을 시작했다”고 발표하면서, 즉각 재보복에 나섰음을 밝혔다.
이어지는 무력 충돌과 보복전으로 양측의 전면전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커졌다. 뉴욕타임스(NYT)는 “이스라엘이 헤즈볼라를 굴복시키려 한다. 지상전으로 번질 수 있는 헤즈볼라의 공격적 대응 가능성이 커졌다”고 분석했다.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미 정부 고위 당국자들이 양측의 전투 격화로 인한 전면전 촉발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간의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양측은 2006년 이후 18년 만에 지상전을 벌이게 된다. 이스라엘이 1년 가까이 전쟁을 벌여온 이스라엘 남서쪽 하마스의 근거지 가자지구로부터 북쪽의 레바논으로 대(對)이슬람 전선의 무게중심이 바뀔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마스와 헤즈볼라는 모두 이란의 지원을 받는 반(反)이스라엘 ‘저항의 축’에 속한다.
레바논의 주류 정치권에도 진출한 헤즈볼라는 하마스에 비해 규모가 크고 조직력도 탄탄해 전쟁 발발 시 차원이 다른 전면전으로 번질 수 있다. 헤즈볼라는 42년 전인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남부 침공을 계기로 결성된 조직으로, 이후 레바논 내전과 이스라엘과의 분쟁을 통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북한식 ‘땅굴’ 전술과 자살 폭탄 테러로 레바논 남쪽의 이스라엘군을 반복적으로 공격했고, 이스라엘군은 결국 2000년 레바논에서 철수했다.
헤즈볼라가 이란·시리아의 지원을 받아 이스라엘 북부를 계속 위협하자 이스라엘은 ‘북부의 안보 보장’을 내세워 2006년 레바논 남부로 다시 진군(進軍)해 헤즈볼라 무력화에 나섰다. 이스라엘은 그때도 헤즈볼라의 땅굴·게릴라 전술에 시달리다 유엔의 중재로 휴전을 맺고, 다시 철수하는 굴욕을 겪었다. 하마스 문제와 더불어 당시 헤즈볼라 문제를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 것이 이스라엘 안보의 가장 큰 ‘구멍’이 됐다는 것이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등 이스라엘 보수파의 판단이다.
이스라엘은 지난해 10월 하마스와의 전쟁 발발 이후 헤즈볼라가 북부를 로켓으로 공격한 탓에 지역 주민 10만명을 피란시킨 상태다. 피란민들은 네타냐후 정부에 “집으로 돌아가게 헤즈볼라 공격을 막을 조치를 취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NYT는 “이스라엘의 목표가 하마스 궤멸에서 헤즈볼라 저지와 피란민 귀가로 바뀐 듯하다”고 분석했다. 이스라엘이 전쟁의 목표를 지난 1년간 주력했던 하마스 퇴치에서 확대해 헤즈볼라까지 뿌리 뽑으려 나섰다는 뜻이다.
그래픽=양인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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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정철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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