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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2 (일)

‘영원한 재야’ 장기표 빈소 추모 발길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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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동안 변함없이 맑고, 곧고, 바르던 사람”

조선일보

22일 오후 12시쯤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 빈소. /김보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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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재야’로 불리는 장기표(79) 신문명정책연구원장 빈소에 22일 정치인 등 각계 인사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장 원장은 담낭암 투병 끝에 22일 오전 1시 35분 입원 중이던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숨을 거뒀다. 고인은 두 달여 전인 지난 7월 16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건강 상태가 매우 안 좋아 병원에서 진찰받은 결과 담낭암 말기에 암이 다른 장기에까지 전이돼 치료가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다”며 “당혹스럽지만 살 만큼 살았고, 한 만큼 했으며, 또 이룰 만큼 이루었으니 아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공식 조문은 이날 오후 2시부터 시작될 계획이었지만, 서울대병원에 차려진 빈소 앞에는 오후 12시 전부터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 홍준표 대구광역시장, 윤재옥·김미애·김기현·김민전 국민의힘 의원 등이 보낸 조기(弔旗)와 화환이 도열됐다. 오후 2시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보낸 화환이 도착해 영전에 놓였다.

빈소에는 그의 생전 행보를 존경하던 이들의 추모 발길이 이어졌다. 오전 11시쯤 빈소에 도착한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은 “후진국사회연구회(후사연)으로 나를 영입한 선배인 장기표 선생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사표(師表·스승의 표상)”라면서 “지금 민주화 운동을 부르짖는 제도권 정치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로, ‘전태일 정신’을 제대로 알린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중간에 말을 멈추고 먼 곳을 응시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김 장관은 “전태일은 한자로 작성된 근로기준법을 읽지 못해 옥편을 하나하나 찾아야 했는데, 생전에 서울대 법대생인 장기표를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겠나”라고 말했다.

고용노동부는 김문수 장관이 이날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고인에게 추서된 국민훈장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김 장관은 취임 후 고인에 대한 서훈을 추진했으며, 이날 고인이 별세한 직후 추서가 결정됐다고 노동부는 설명했다.

경남 김해 출신인 장 원장은 서울대 법대 재학 중 민주화·노동 운동에 뛰어들었다.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 유신 독재 반대 시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등으로 수배와 도피를 반복했고 10년 가까이 수감됐다. 김영삼 정부가 민주화 운동 관련자 보상법에 따라 민주화 보상금을 지급했지만 장 원장은 보상금을 신청하지 않았다. 당시 그는 “누구나 자기 영역에서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데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보상금을 받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민중당 등 여러 정당 창당에 관여하고 1992년부터 7차례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지만 국회에 진입하지 못해 ‘영원한 재야’로 불린다. 지난 4·10 총선을 앞두고는 국회의원 특권 폐지 운동을 펼쳤다.

빈소를 찾은 한석호 전태일재단 전 사무총장은 “장 원장은 정치 자체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운동의 한 방법으로써 정치에도 참여하려 한 것”이라고 했다. 한 전 총장은 “김해에서 자라며 소작농들이 지주에게 엄청난 소작료를 바치는 걸 봐 온 장기표 선생은 현실을 바꾸기 위해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며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현실뿐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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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오후 12시쯤 고(故) 장기표 원장의 빈소 앞에 각계 인사가 보낸 조기와 화환이 놓였다. /김보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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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30분쯤 빈소를 찾은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은 “장 원장은 논쟁을 즐기고 글을 많이 쓰는 지식인으로 모든 이념가·정치세력은 장기표의 표적이 돼 비판받았다”면서 “장기표는 자기주장이 강한 만큼 외롭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장 원장은 1964년부터 모든 민주화 운동을 같이 한 60년 지기 친구이자 동기”라며 “본인의 길이 확고하여 구설에 오르기도 했으나, 옆에서 본 장 원장의 정신은 사람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오후 4시쯤 빈소를 찾은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은 “민주화 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셨던 분이고, 부귀 영화보다는 소신과 철학을 추구하셨던 올곧은 분이셨고, 한국 정치사회에 길이 남을 분”이라면서 “장 원장은 정계 진출보다도 원하는 가치를 따라 움직이던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했다.

지난해 4월부터 시민단체 ‘특권폐지운동본부’에서 장 원장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다는 배경혁 자유통일당 정책국장은 “9월 초까지 매주 접객도 했지만 급격히 건강이 악화됐다. 입원 전에는 매일 아침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빠른 걸음으로 등산을 하며 건강을 유지하던 분”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윤 대통령과도 종종 연락하며 안부를 묻곤 했다”고 했다. 이어 “장 선생은 시장 과일 가게에 가면 흥정해서 값을 깎는 게 아니라, 매대에 놓인 과일을 모조리 사면서 돈도 얹어주던 사람”이라면서 “거리에 앉아 있는 이들이 얼른 집에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에 그렇게 하시다 사모님께 혼나기도 하셨다”고 했다.

장례는 5일장으로 치뤄지며, 발인은 26일 오전 5시다.

[김보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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