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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2 (일)

이슈 국회의원 이모저모

‘영원한 재야’ 장기표 별세…향년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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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21년 2월 장기표씨가 국회 정론관에서 대선 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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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이 지병인 담낭암과 싸우다 22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향년 78.



1945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김해와 마산에서 유소년기를 보냈다. 서울대 법학과를 다니던 1970년 전태일 분신을 접한 뒤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50년 넘게 재야·정당운동에 매진했다. 학생운동·재야운동 시절엔 여러 시국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민청학련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등으로 9년간 수감 생활을 했고 12년간 수배를 당해 공안당국에 쫓겼다.



40대였던 1980년대부터 1990년대초까지 김근태·이부영 등과 함께 재야를 이끈 ‘트로이카’였다. 하지만 이후의 정치적 삶은 불운했다. 1992년 이재오·이우재 등 재야 명망가들과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등 노동운동 세력 일부가 창당한 민중당에서 국회의원 후보로 서울 동작갑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살면서 모두 7차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지만 모두 떨어졌다. 대선에도 도전해 세 차례 출마선언을 했으나 후보등록과 완주에는 실패했다.



정치활동 기간 ‘영원한 재야’ ‘풍운아’로 불렸다. 하지만 그가 ‘주류 권력’과 내내 불화한 것도 아니었다. 통합민주당, 새천년민주당 당적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고, 말년엔 국민의힘의 전신인 미래통합당에서 공천을 받아 총선에 출마했으나 역시 떨어졌다. 재야 시절엔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과도 가까웠다. 1987년 민주화 뒤 열린 대선 국면에선 “지역주의 극복”을 명분으로 ‘김대중 비판적 지지론’ 쪽에 서서 김영삼 지지파의 ‘후보단일화론’에 맞섰다. 하지만 이후엔 김대중의 ‘4자 필승론’을 비판하며 김대중을 “지역주의의 원조”라 지목해 맹렬히 비판했다.



민주당 계열 정당이 배출한 노무현·문재인 전 대통령과는 특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 노무현을 향해선 “허구와 정략에 기대 스타가 된 정치인”으로 깎아내렸다. 2017년 대선 당시엔 “문재인이 후보가 되면 야권이 필패한다”며 독자 출마를 선언하기도 했다. 같은 영남 출신으로 ‘재야의 변방’에만 머물렀던 두 사람과는 처음부터 섞이기 어려운 관계였다.



말년에는 ‘신문명정책연구원’을 만들어 저술과 국회의원 특권 폐지 운동에 집중했다. 50년 넘게 이어진 그의 정치활동이 ‘불운’과 ‘불화’로 점철된 것을 두고선 오롯이 정치적 소신 때문이라기보다 ‘타고난 반골 기질 탓’이거나 서울대 법대를 나와 일찌감치 재야 명망가로 떠오르며 체질화한 ‘영남 출신 엘리트주의’의 영향이란 지적도 적지 않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무하씨와 딸 2명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차려진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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