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장기표씨가 국회 정론관에서 대선 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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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이 담낭암과 싸우다 22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향년 78.
1945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김해와 마산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서울대 법학과를 다니던 1970년 전태일 분신 소식을 접한 뒤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50년 넘게 재야운동과 정치활동에 매진했다. 학생·재야운동 시절엔 다수의 시국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민청학련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등으로 9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수배를 당해 공안당국에 쫓긴 기간만 12년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 사이, 40대의 장기표는 김근태·이부영과 함께 재야를 이끈 ‘트로이카’였다. 하지만 이후의 정치적 삶은 불운했다. 이재오·이우재 등 재야 명망가들과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등 노동운동 세력 일부가 연합해 만든 민중당에서 1992년 국회의원 후보로 서울 동작갑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들었다. 이때를 포함해 그가 살면서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한 것만 무려 7차례인데, 모두 낙선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것도 세 차례다. 물론 완주하지 못했다.
출마와 낙선, 창당과 탈당을 거듭했으나 제도권의 안정적인 자리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 이런 이력 때문에 ‘영원한 재야’라는 별칭이 붙었다. 하지만 그가 ‘주류 권력’과 내내 불화한 것은 아니다. 통합민주당, 새천년민주당 당적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고, 말년엔 국민의힘의 전신인 미래통합당 공천을 받아 총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재야 시절에는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과도 가까웠다. 1987년 직선제 개헌 뒤 열린 대통령 선거 국면에선 “지역감정 극복”을 명분으로 ‘김대중 비판적 지지론’ 쪽에 서서 김영삼 지지파의 ‘후보단일화론’에 맞섰다. 하지만 이후엔 김대중 선거캠프가 대선 당시 내세웠던 ‘4자 필승론’을 언급하며 김대중을 “지역주의의 원조”로 지목해 맹렬히 비판했다.
민주당이 배출한 노무현·문재인 전 대통령을 향해선 줄곧 적대감을 표출했다.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 노무현을 향해선 “허구와 정략에 기대 스타가 된 정치인”으로 깎아내렸다. 2017년 대선 때는 “문재인이 후보가 되면 선거에서 필패한다”며 독자 출마를 선언했고, 문재인 당선 뒤엔 “사이비 진보” “독재”라며 퇴진운동에 앞장섰다. 같은 영남 출신으로 ‘재야의 변방’에만 머물렀던 두 사람과는 처음부터 섞이기 어려운 관계였다.
‘불운’과 ‘불화’로 점철됐던 장기표의 정치활동이 오로지 ‘정치적 소신’ 때문만이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일각에선 타고난 ‘반골 기질’에 영남 출신으로 서울대 법대를 나와 이른 시기에 재야의 명망가 대접을 받으며 체질화한 ‘엘리트주의’를 그 배경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무하씨와 딸 2명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차려졌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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