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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1 (토)

민경우 “유엔 가입, 금강산 축전… 주사파, 북 입장 따라 돌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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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련 사무처장 출신 민경우가 본 2국가론

조선일보

시민단체 ‘길’의 민경우 대표가 20일 서울 중구 조선일보미술관에서 본지와 만나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통일하지 말자’ 발언 등과 관련해 설명하고 있다. 민 대표는 과거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을 맡아 NL계열 통일운동에 참여했다. /고운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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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우(59) 시민 단체 ‘길’ 대표는 1995년부터 10년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을 맡아 민족해방(NL) 계열의 ‘통일 운동’에 참여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4년 2개월간 수감 생활도 했다. 민 대표는 20일 본지 인터뷰에서 임종석(58)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전날 ‘9·19 평양 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에서 “통일하지 말자”며 제기한 ‘남북 2국가론’에 대해 “김정은이 제시한 2국가론이 한국 제도권 정치에 본격적으로 진입했다는 의미”라고 했다.

-임 전 실장의 연설을 어떻게 봤나.

“불과 5년 전에 통일 운동을 하겠다고 한 사람이 ‘통일하지 말자’며 갑자기 입장을 바꿨다. 그러면서 통일부 정리, 국가보안법 폐지까지 언급했다. ‘북한의 입장은 일단 맞다’고 보는 심리로 보인다.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개인적으로 통일 운동을 하면서 이런 사례를 자주 봤다.”

-작년 말 김정은이 ‘적대적 2국가 선언’을 하고 대남 기구를 폐지하자 한국에서도 범민련 남측본부가 해산했다.

“올 상반기 북한이 국내 NL 진영 쪽에 ‘통일 문제는 빼자’는 이야기를 전했다고 들었다. 오랜 기간 ‘통일 운동’을 한 범민련 남측본부,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가 각각 자주연합, 자주통일평화연대로 재편됐다. 그들의 주장에서 통일은 빠지거나 줄고 평화 공존, 자주, 반제국주의가 강조됐다. 그런데 북한이 보기에 한국에서 별다른 반향이 없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임종석이라는 ‘대형 메신저’가 북한의 새 노선과 유사한 언급을 한 것이다.”

조선일보

1989년 방북한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 - 1989년 8월 15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 임수경(왼쪽)씨와 천주교정의사제구현단 문규현 신부가 방북을 마치고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고 있다. 임씨 방북은 당시 전대협 의장이었던 임종석 전 비서실장이 주도했다. /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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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정체성 삼았던 정치인이 ‘반통일’을 주장했는데.

“통일 운동사를 보면 급격한 입장 변화가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1991년 남북 유엔 동시 가입 당시 북한의 입장이 하루아침에 바뀌자 국내 재야 세력도 입장을 바꾼 적이 있다. 한국은 남북이 유엔에 각각 동시 가입하자는 입장이었고, 북한은 이를 ‘반통일 정책’이라며 남북이 ‘단일 의석’으로 가입하자고 주장했다. 국내 재야 세력은 오랜 기간 북한 입장을 지지했고, 단일 의석 가입을 ‘통일의 시금석’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동구권 국가들이 반대하지 않아 한국이 먼저 유엔에 가입할 가능성이 커지자 북한이 먼저 유엔에 가입해 버렸다. 그때 북한이 낸 성명을 지금도 기억한다. 주사파들은 내부적으로 혼란이 있었지만 ‘북한이 하는 건 일단 믿어 보자’면서 따라갔다.”

-통일 운동에서 북한 입장이 그만큼 중요했나.

“2001년 금강산에서 6·15 축전을 하기로 했다. 김대중 정부가 (1997년 이적 단체 판결을 받은) 범민련 남측본부가 의장단에 들어가면 행사를 불허하겠다고 통보했다. 범민련 내부 회의에서 ‘반정부 투쟁을 하자’는 등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그때 북한에서 팩스가 한 장 들어왔다. ‘이번엔 양보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논쟁은 그것으로 끝났다. 범민련 북측본부 명의로 온 팩스지만 실제론 북한 통일전선부가 내린 지시라고 보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통일 운동을 할 때 북한과 연계가 있었나.

“통일 운동에 참여한 대학생이나 시민 중엔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도 많았다. 다만 1980년대 후반에 북한이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을 통해 한국 학생 운동 세력에 ‘사상적 지도’를 한 것도 사실이다. 북한이 한민전 방송을 하면 단파 라디오로 듣고 누군가 밤새 녹취록을 만들어 새벽에 학생회 방에 놓고 갔다. 이걸 복사해서 캠퍼스에 돌렸다. 영향력이 엄청났다. 1989년 임수경 방북 때도 한민전 방송에서 ‘피를 토하는 호소’라는 표현을 써가며 방북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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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후 서울 중구 조선일보미술관에서 민경우 대표가 최근 이슈가 된 '두 국가론'과 관련해 인터뷰하고 있다. /고운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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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운동을 하면서 북한에서 지시를 받은 적이 있나.

“1995년부터 10년간 범민련 남측본부에서 일할 때 일본의 조총련 정치국장과 많게는 한 달에 15번씩 통화했다.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으면 정치국장이 북한에 의견을 묻고 팩스를 받아 우리에게 보내줬다. 북한의 지도가 일상적으로 작동한다고 봐야 한다.”

-북한이 왜 적대적 2국가론을 내걸었다고 보나.

“북한이 원하는 연방제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2001년 ‘군자산의 약속’을 기점으로 NL계 인사들이 제도권 정치 진출을 결심하고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하지만 김정은이 보기엔 앞으로 한국 내 친북·재야 세력의 집권 가능성이 없고 연방제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여기에 더해 북한 체제 안정 차원에서 2국가로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한다고 본 것 같다. 한국에서 유입되는 사상을 억제할 근거가 필요했던 것 아닌가 싶다.”

-국내에서 2국가론 주장이 이어질까.

“국내에서 2국가 주장은 극소수였다. 일부 인사가 칼럼을 썼지만 반향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임 전 실장 발언으로 이 이슈가 정치권에 들어왔다. 북한도 한국 내 여론을 보면서 정치권이든 다른 채널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계속 펼칠 거라고 본다. 핵무기 보유를 기정사실화하고 한국과의 관계도 이번에 한 차례 정리하겠다는 의도로 봐야 한다. 북한은 일단 사업을 하기 시작하면 크게 한다.”

-국내 NL계 통일 운동 진영은 어떻게 될 것으로 보나.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지리산에 남은 빨치산들이 그랬듯 하산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박수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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