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9.20 (금)

[오늘과 내일/신광영]위원들 로또처럼 뽑으니 믿어달라는 檢수사심의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동아일보

신광영 논설위원


미국 법원에서는 형사사건을 맡을 판사를 정할 때 요즘도 나무로 된 회전원통을 쓴다. 팔각형의 원통에 판사들 명함이 각각 봉투에 담긴 채 들어있는데 법원 공무원이 원통을 돌려 명함을 골고루 섞은 뒤 그중 하나를 꺼내든다. 기소한 검사와 피고인 측 변호사는 원통의 삐걱거리는 소리를 함께 들으며 이 과정을 지켜본다. 미국도 민사소송은 우리처럼 무작위 전산 배당을 하지만 신체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는 형사재판에선 이런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판사 배정에서 불이익을 받았다는 의심이 들지 않도록 공개 추첨을 하는 것이다. 정의는 결과에 이르는 과정이 눈에 보여야만 비로소 실현된다는 게 미국 사법제도의 오랜 원칙이다.

‘눈에 보여야 정의’ 美 법원의 원칙

우리 형사사법 절차에도 비슷한 방식이 쓰이는 경우가 있다. 검찰의 수사와 기소가 적정한지 외부 전문가들이 검증하는 수사심의위원회가 열릴 때다. 법률가, 학자, 언론인 등 약 250명의 위원단 풀에서 15명의 심의위원을 뽑는데 로또 추첨기 같은 기구가 동원된다. 위원장(현재는 강일원 전 헌법재판관)이 기구에 손을 넣어 고유번호가 적힌 공 15개를 무작위로 뽑는 식이다. 이것만 보면 수사심의위가 투명하게 운영되는 것 같지만 딱 여기까지다. 선정된 위원 15명이 누구인지,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는 모두 비공개다. 다수결로 나온 결론만 짤막히 발표될 뿐 몇 대 몇으로 나온 결정인지도 알 수 없다.

수사심의위는 검찰이 하겠다고 해서 도입된 제도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말 검찰개혁의 압박이 거세지자 외부 감시를 받겠다며 검찰이 이 제도를 꺼내들었다. 기소 독점 등 검찰권이 공정하게 행사되는지 객관적인 검증을 받겠다고 만든 제도라면 절차가 투명한 게 핵심이다. 사건 성격에 맞는 전문가가 참여했는지, 결론에 이른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 있어야 수사심의위의 결정을 신뢰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걸 모두 숨긴 채 검찰과 위원들의 선의를 믿어달라는 게 지금의 수사심의위다.

검찰은 심의위원이 누군지 알려지면 외압의 우려가 있다고 한다. 이는 회의 종료 후 명단을 공개하고 위원단 풀을 정기적으로 바꾸면 될 일이다. 위원들 스스로가 공개되는 걸 부담스러워한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수사심의위는 국민적 의혹이 제기되거나 사회적 이목이 집중된 사건에서 피의자 기소 여부, 수사 계속 여부를 가리는 중요한 절차다. 이런 결정에 참여한 전문가가 자기 이름을 걸지 않고 익명성 뒤에 숨어서 낸 의견이라면 무게가 실리기 어렵다. 위원들 중에는 수사기록을 볼 수도 없고, 양측의 30쪽 분량 의견서와 짧은 발표만으론 사안을 충분히 따져보기 어려워 의견 공개를 망설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 역시 검찰이 위원들에게 충분한 자료와 시간을 제공해 풀어야 할 문제다.

수사심의위가 지금처럼 베일에 가린 채 운영되면 부작용만 커질 수 있다. 검찰이 수사가 미흡해 여론의 비판이 예상될 때 방어막으로 삼거나, 부담스러운 결정을 하기 위한 수순으로 이 제도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사심의위의 결론에 꼭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어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을 수 있는 카드이기도 하다.


제 기능 하려면 위원-회의록 공개해야


수사심의위가 투명하게 운영됐더라면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수수 사건은 이 제도의 존재 이유를 보여줄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수사팀이 무혐의 처분하려는 이 사건을 두고 외부 전문가 15명이 자기 이름을 걸고 치열하게 논쟁한 회의록을 있는 그대로 공개했다면 어땠을까. 수사팀과 같은 결론이 나왔더라도 ‘김 여사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절차’라는 비판이 지금처럼 격렬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원석 전 검찰총장은 디올백 사건 수사심의위를 소집하며 “더 이상의 논란이 남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지만 국민들이 눈으로 볼 수 없는 수사심의위로는 그런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