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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9 (목)

상한 음식 버리고 성묘 거르고…폭염이 바꿔놓은 추석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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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복궁에서 한복입은 한 어린이가 저고리를 풀며 더위를 식히고 있다. 기상청은 이날 오전 강원도와 경기도 북부를 제외한 전국 대부분 지역에 폭염 특보를 발효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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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새 송편이 쉬었네. 어제저녁에 받아온 건데….”



추석 당일인 지난 17일 오전, 경기도 발안에 있는 선산을 찾은 최아무개(52)씨는 송편 일부를 차례상에 올리지도 못하고 버렸다. 이례적으로 더운 날씨 때문에 일부가 상한 것이다. 아침부터 내리쬐는 햇볕에 차례를 지내기 전부터 가족·친지의 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차례가 끝난 뒤 여느 때처럼 자리를 펴고 음식을 나눴으나, 더위를 견딜 수 없어 모두 뜨는 둥 마는 둥 하다 일찍들 일어섰다. 어르신들은 “추석날이 이렇게 더운 건 내 평생 처음”이라고 입을 모았다.



서울 광진구에 사는 강아무개(30)씨네도 추석날 선산에 모이긴 했으나, 너무 더워서 “살면서 처음으로” 차례음식을 먹거나 평소에 하는 회비·회계 보고 등은 다 건너뛰고 곧바로 철수했다. 명절마다 오형제가 한데 모여 음식을 만들고 차례를 지낸다는 김기운(가명·61)씨는 심상치 않은 늦더위에 나름 대비를 했다. 선풍기 네대를 돌려가며 음식을 만들었고, 상하지 않도록 냉장고 두대에 김치냉장고까지 동원해 보관했던 것이다. 그래도 사람이 더운 건 견딜 수가 없어서 서둘러 차례를 지내고 친척들을 일찍 돌려보냈다고 했다.



연휴 내내 폭염·열대야로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날씨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추석 폭염’에 당황했다. 차례를 지내던 집들에선 행사를 축소하거나 성묘 자체를 취소하는 사례가 잇따랐다. 한가위 연휴를 아예 여름휴가처럼 ‘피서’로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서울에 거주하는 30대 직장인 정아무개씨네는 추석 당일 너무 더운 날씨 때문에 야외 수영장을 찾았는데, “물놀이 나온 가족 단위 방문객들로 수영장이 인산인해였다. 선탠을 하는 외국인들 등 여름휴가철과 똑같은 풍경”이었다고 전했다. 강원도 원주 산자락에 위치한 이아무개(82)씨 집은 한여름에도 시원한 편인데, 올해엔 “거실에 있는 에어컨과 선풍기 네대만으론 놀러 온 세딸 식구 등 대가족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했다.



각종 신기록이 ‘추석 폭염’을 증명했다. 연휴 동안 남부지방에선 ‘9월 최고기온’ 기록이 새로 세워졌다. 추석 당일 광주의 낮 기온은 35.7도로 치솟아 1939년 이래 가장 높았다. 이날 의령(37.2도), 순창(36.6도), 진주(35.8도), 경주(36.2도) 등 21곳에서 9월 최고기온 기록이 경신됐다. 다음날인 18일엔 통영(34.6도), 정읍(36.5도), 영광(35.3도) 등 9곳에서 최고기온을 기록했다. 18일 아침 기준으로 서울, 인천, 대전, 제주 등에 열대야가 발생해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늦은 열대야’ 기록을 경신했다. 춘천에서도 같은 날 열대야가 발생했는데, 이는 58년 만에 처음 발생한 ‘9월 열대야’ 기록이다. 제주는 18일 아침 기준 올해 열대야 일수가 총 72일로, 연간 열대야 일수 1위를 경신해나가고 있다. 서울 전역에는 지난 10일 사상 처음으로 ‘9월 폭염경보’가 발효됐는데, 연휴 마지막 날인 18일에도 다시 폭염경보가 내려져 역대 가장 늦은 폭염경보 기록을 갈아치웠다.



연휴 기간 이처럼 폭염과 열대야가 이어진 이유는 제13호 태풍 ‘버빙카’가 일본 오키나와와 중국 상하이 사이를 지나며 한반도에 고온다습한 남동풍을 불어넣은 탓이다. 게다가 한반도 상공에 북태평양고기압과 티베트고기압이 이중으로 덮여 있어 북쪽으로부터 내려오는 찬 공기를 막고 태양열을 받아들이기 좋은 조건을 형성하고 있다.



‘추석 폭염’은 주말쯤에나 한풀 꺾일 전망이다. 18일 기상청 중기예보를 보면, 21~28일 아침 최저기온은 14~25도, 낮 최고기온은 21~29도로 최고기온이 30도를 훌쩍 넘었던 연휴 기간보다 시원할 것으로 예보됐다. 버빙카와 비슷한 경로로 북상하고 있는 제14호 태풍 ‘풀라산’이 변수다. 다만 폭염은 가셔도 평년보다 더운 날씨는 10월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적도 동태평양 해수면 온도가 낮아지는 라니냐 현상이 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라니냐는 아열대 북태평양 지역에 고기압을 발달시켜, 우리나라엔 고온다습한 남풍 유입이 증가한다. 기상청은 “우리나라는 라니냐 발생 때 가을철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며 “이에 따라 9~10월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기온이 평년보다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정봉비 기자, 전국·사회 종합 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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