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헤즈볼라 ‘삐삐’ 동시다발 폭발…12명 사망·2750여명 부상

1시간여 이어져…손 절단도 다수

레바논 “이스라엘의 원격 공격

무선호출기에 소량 폭발물 심어”

무선호출기 폭발 순간 한 남성이 17일 오후(현지시간)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한 시장에서 물건을 사려는 순간(왼쪽 사진) 몸에 지니고 있던 무선호출기가 폭발하자(가운데) 그 충격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다. X(옛 트위터) 캡처

레바논과 시리아에서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 구성원들이 소지한 무선호출기가 17일(현지시간) 동시에 폭발해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레바논 정부와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의 ‘원격 공격’이라며 자국에 대한 테러와 주권 침해라고 비판했다.

AP·로이터통신 등의 보도에 따르면 폭발은 이날 오후 3시30분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남부 다히예와 동부 베카 일대에서 일제히 시작됐다. 폭발은 약 1시간 동안 지속됐고,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지역에서도 폭발이 보고됐다.

레바논 보건부는 이번 폭발로 8세 소녀 등 아동 2명을 포함해 최소 12명이 사망했고, 중태 200여명을 포함해 2750여명이 다쳤다고 18일 밝혔다. 모즈타바 아마니 레바논 주재 이란 대사도 경미한 부상을 당했다. 사상자 대부분이 손과 얼굴, 복부와 엉덩이 주변에 부상을 입었다. 손이 절단된 사람도 다수인 것으로 전해졌다.

부상자 및 목격자 증언과 폭발 장면이 찍힌 영상 등을 종합하면, 무선호출기에서 메시지 수신음이 울렸고 메시지를 확인하고자 호출기에 손을 대거나 얼굴을 가깝게 하고 화면을 보는 과정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호출기가 뜨거워지다가 터졌다는 증언도 나왔다.

폭발한 호출기는 헤즈볼라가 최근에 도입한 모델이다. 헤즈볼라 최고지도자인 하산 나스랄라는 지난 2월 이스라엘의 위치추적을 우려해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말라고 명령했고, 이후 헤즈볼라는 통신 수단으로 무선호출기를 채택했다. 국내에선 ‘삐삐’라고 불리며 휴대전화가 대중화되기 이전인 1990년대 폭넓게 사용됐다.

레바논 고위 안보 소식통은 헤즈볼라가 대만 골드아폴로사의 무선호출기 AP924 모델 5000대를 주문했으며, 올해 봄 호출기가 레바논에 들어왔다고 로이터에 말했다. 이 소식통은 이스라엘 해외 정보기관 모사드가 몇달 전 헤즈볼라가 주문한 호출기 5000개에 소량의 폭발물을 심었다고 말했다.

17일 오후(현지시간) 레바논에서 폭발한 무선호출기. X(옛 트위터) 캡처

대만 제조사 “상표권 계약 맺은 헝가리 기업서 생산”

뉴욕타임스도 복수의 미국 당국자들 말을 인용해 이스라엘이 호출기 안에 1~2온스(28.3~56.6g) 정도의 폭발물을 심었고, 호출기엔 원격으로 터뜨릴 수 있는 스위치도 내장돼 있었다고 전했다.

다만 제조사로 지목된 골드아폴로 측은 18일 성명을 내고 폭발에 사용된 호출기가 자사 생산 제품이 아니며, 골드아폴로와 상표권 계약을 맺은 헝가리의 BAC가 생산하고 판매한 것이라고 밝혔다.

대만 경제부도 호출기가 대만에서 레바논으로 직접 수출된 기록이 없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의 호출기 공급망에 침투했을 수 있다며 이번 폭발이 모사드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전직 영국군 장교이자 폭발물 처리 전문가인 숀 무어하우스는 “연필 지우개만 한 작은 폭발물이 (호출기에) 미리 삽입됐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무선호출기가 헤즈볼라에 공급되기 전 삽입됐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모사드 작전이 매우 성공적이라는 의미”라고 AP에 말했다. 로이터는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휴대전화에 폭발물을 넣거나, 해커들이 원격으로 악성코드를 주입해 휴대전화를 과열시켜 폭발시킨 전례가 있다고 전했다.

레바논 정부는 이 공격이 “이스라엘의 사이버 공격”이라며 “레바논에 대한 주권 침해”라고 규탄했다. 헤즈볼라는 사망자 가운데 2명이 헤즈볼라 대원이라며 이스라엘을 향해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스라엘군은 이번 사건에 대한 논평을 거부했다. 매슈 밀러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미국 정부가 이 사건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으며,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번 폭발은 이스라엘 안보 내각이 레바논 국경지대에서 대피한 이스라엘 북부 주민들이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도록 헤즈볼라의 공격을 중지시키는 것을 공식적인 ‘전쟁 목표’에 추가한 지 몇시간 만에 발생했다.

이스라엘과 헤즈볼라는 지난해 10월 가자지구 전쟁 발발 후 국경지대에서 무력충돌을 이어왔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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