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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0 (금)

“여고생때 교사 7~8명 때려죽였다”…홍위병 우상이었던 ‘쑹빈빈’ 지병으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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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쑹빈빈이 문화대혁명 초기인 지난 1966년 8월 18일 천안문 성루에 올라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팔에 붉은 완장을 채워주는 모습. [사진 출처 = X(옛 트위터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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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문화대혁명(1966~76년) 당시 교사 구타 등 폭력을 주도해 온 홍위병의 상징인 쑹빈빈(宋彬彬)이 지난 16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에서 지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8일 중앙일보 보도 등에 따르면 홍콩 매체와 해외 소셜미디어(SNS) 등에서는 쑹이 향년 77세로 사망했다고 전했다. 다만, 인민일보 등 관영 매체는 18일까지 기사화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쑹은 1966년 8월 18일 천안문 성루에 올라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팔에 직접 홍위병을 상징하는 붉은 완장을 채워준 인물로 유명하다.

당시 마오 주석은 쑹에게 이름이 ‘논어’에 실린 겉과 속이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인 “문질빈빈(文質彬彬)의 빈인가?”라고 물었다.

쑹이 “그렇다”고 말하자 마오는 “무력이 필요하지 않나(要武嘛)”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쑹은 ‘야오우(要武)’로 이름을 바꿨다.

쑹은 고등학생 당시 학생이 교사를 구타하고,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는 등 전국적인 무장투쟁을 선동하며 폭력 시위를 주도했다.

홍콩 명보에 따르면 당시 쑹을 둘러싸고 그가 모교의 볜중윈(卞仲耘) 교감 등 7~8명을 직접 구타해 숨지게 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그러던 와중 1967년 8월 당시 동북국 제1서기였던 그의 부친 쑹런충은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박해를 받았다. 쑹과 모친도 이에 연루돼 수난을 당했고,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쑹은 1980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세월이 지나 2014년 쑹은 홍위병과 함께 모교를 찾아 잘못을 빌었다.

교정의 볜중윈 교감 흉상에 머리 숙여 사과한 뒤 ‘나의 사죄와 감사’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그는 공개 사과문에서 “문화대혁명은 한바탕의 대재앙이었다”며 “평생 괴로웠고 후회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과거의 비극과 잘못을 잊는다면 비극은 다시 재연될 수 있고, 잘못을 다시 저지를 수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볜 교감의 유가족은 사과를 거부했다. 벤 교감의 남편인 왕징야오 전 중국과학원 역사 연구원은 “홍위병의 거짓 사과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진상 규모를 촉구했다.

한편, 문화대혁명 기간 중국의 상당수 중고생·대학생들은 홍위병이라는 이름으로 마오가 만든 정치적 대중운동조직에 동원됐다. 당시 이들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박해를 받아 사망한 사람은 수천 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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