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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9 (목)

개혁 타이밍 놓쳤다가 30년을 … 일본의 몰락, 한국도 닮아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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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경 명예기자 리포트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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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1987년 여름, 옆자리에 앉은 분이 필자에게 미국에 가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미국, 일본, 유럽 등지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사업가였는데, 필자가 유학을 간다고 답하자 대뜸 "미국에 도착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 근로자들은 게으르고, 나라가 점점 쇠약해지고 있어 앞으로는 배울 것이 없다"고 덧붙였다. 당시 일본 경제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무역수지 흑자가 계속됐고, 미쓰비시의 록펠러센터와 웨스틴호텔 매입, 소니의 컬럼비아 영화사 인수 등 관련 기사가 연이어 나왔다.

일본은 곧 세계 경제를 주도할 것처럼 보였다. 자동차와 반도체 산업에서 미국을 능가하며 명성을 높였고, 세계 각국에서 일본인 관광객들이 넘쳐났다. 자연히 일본식 경영을 배워야 한다는 열풍이 기업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대학에서도 일었다.

유학 기간 내내 그 사업가의 말을 잊을 수 없었지만 그 사업가도, 미국과 일본의 정책당국자들도, 경제학자들과 투자자들 또한 그 시점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또는 '30년'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보다 2년 앞선 1985년 9월 22일, 미국·영국·프랑스 등 강대국들은 뉴욕의 플라자호텔에서 회의를 열고 무역수지 흑자가 커지고 있던 서독과 일본에 대해 환율의 대폭적인 평가절상을 요구했다. 그 후 몇 년에 걸쳐 엔화는 실질환율 기준으로 미 달러 대비 40% 평가절상됐다. 일부에서는 이 플라자 합의가 1990년대 초반 일본에서 발생한 자산 버블 붕괴의 원인 중 하나이며,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를 유발한 계기가 됐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플라자 합의 자체가 일본 경제 침체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지 않는다. 환율 평가절상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대미 수출은 여전히 강세를 유지했다. 오히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일본 자동차 산업은 자구책으로 기술 혁신을 이루며 경쟁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는 시각도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은 왜 발생했을까? 30년 전 일본의 상황과 현재 한국의 상황이 매우 비슷하다는 견해도 있다. 분명 유사한 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적지 않다. 그렇기에 이 문제를 더 깊이 분석하는 것은 한국 경제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다.

첫째로, 일본의 장기 경기 침체의 원인으로 자주 언급되는 플라자 합의와 자산 버블 폭락은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플라자 합의로 인해 일본 경제정책 입안자들이 급격하게 금리를 낮췄고, 이로 인해 부동산 및 자산 시장에 버블이 발생했다. 1990년대 초반 버블이 꺼질 때 금리를 급히 올리면서 경기 침체를 더욱 심화시켰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당국자들의 미숙함이 문제를 더욱 증폭시켰다.

같은 플라자 합의를 체결한 서독에서는 일본이 겪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또한 자산 폭락과 같은 경제 위기는 단기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만,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면 경제는 다시 반등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10년 이상의 장기 침체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둘째로, 재정 및 통화 정책의 실패가 확인된다는 점이다.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 원인으로 일본 경제학자들이 자주 언급하는 것은 자산 시장 붕괴 이후 발생한 이른바 '유동성 함정'이다. 이는 통화 정책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경기 침체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1930년대 대공황과 유사한 상황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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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정책도 병행했지만, 일본과 미국의 경제학자들은 일본 경제가 구조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고속도로, 항만, 공항, 철도 건설 등 공공부문에 쓰인 재정 정책이 효과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정부 부채는 계속 증가하게 됐다.

재정 정책이 효과적으로 사용되지 않으면 성장 잠재력을 저해할 수 있다. 예상되는 경기 침체가 유효 수요의 부족 때문인지, 성장 잠재력의 감소 때문인지 구분하지 못하면서 금융 정책과 재정 정책은 표류하게 됐다.

미국의 학자들은 일본이 장기 침체에 접어들기 전에 경제 구성원들이 예상하는 범위를 넘어서 과감하게 재정 정책을 펼쳤어야 했지만, 일본은 이 기회를 놓쳤다고 분석한다. 과감한 재정 정책의 타이밍과 규모는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며 성장이 둔화되고 있는 한국의 현재 상황에서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문제다.

셋째로, 비효율적이고 수익을 내지 못하는 소위 '좀비 기업'들에 대한 지원이 계속됐다는 점이다. 자원이 낭비되면서 은행들은 혁신적인 중소기업이나 새로운 산업에 자금을 빌려주는 데 제약이 많았고, 그 결과 신용 경색이 발생하게 됐다.

넷째는 인구 고령화다. 사회복지 비용 증가로 정부 부채가 급격히 늘어났다. 다행히 일본은 저축률이 높아 민간 부문에서 정부 부채를 흡수할 수 있어 부정적 영향을 일부 상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의 노동 참여 확대, 고령인구의 정년 연장, 외국인 노동자 확충 등 노동력 감소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이는 한국이 앞으로 맞닥뜨릴 가장 큰 과제이기도 하다.

마지막 관점은 주력 산업의 쇠락과 생산성 저하 문제다. 미국 국세청(IRS)의 한인 경제학자인 김형진 박사는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시행된 미·일 반도체 협약이 일본의 주력 산업이었던 반도체 산업의 쇠퇴를 초래했으며, 이것이 일본 경제 침체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고 분석한다.

미국의 도움으로 성장했던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1985년께 미국을 능가하자 덤핑과 진입 장벽 등의 이유로 제재를 받기 시작했다. 10여 년에 걸쳐 체결된 협약들이 마무리될 즈음에는 일본 반도체 산업이 이미 경쟁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거시적인 측면에서도 일본의 생산성은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2005년과 2014년 일본의 노동시간당 생산성 순위는 각각 43위와 44위였고, 2024년에는 49위로 하락했다.

현재 일본에서는 대학 졸업자들이 취업에 큰 걱정을 하지 않으며, 실업률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경제학자들은 이를 실질 임금의 하락으로 고용 수준을 유지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즉, 낮은 노동 생산성을 실질 임금의 하락으로 보전한 셈이다.

유학을 마친 후 미국 스미스소니언 역사 박물관에서 발견한 책에서 일본의 잠재력에 의문을 갖게 됐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에 출간된 영국 이코노미스트 기자 브라이언 리딩의 책 '일본: 몰락이 온다(Japan: The Coming Collapse, 1992)'에서는 일본 경제와 정치 시스템이 지닌 문제들을 설명하고 있다.

일본 경제가 잘나가던 시절에 쓰인 이 책에서 작가는 일본이 선진국 자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부패한 정치가들의 이권 개입, 비효율적인 농업 정책과 왜곡, 가격 담합, 소수 학교 출신들이 주도하는 이익집단, 한 번 정해진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옮기기 어려운 노동 시장의 경직성, 평균 임금으로는 100년을 벌어야 살 수 있는 높은 주택 가격 등 구조적인 문제들을 지적했다.

물론 일본은 30년 전보다 이러한 문제들을 많이 개선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 제대로 이뤄졌는지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경제 시스템과 체질이 선진화되지 않는 한, 일본은 저성장의 늪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선진국 문턱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는 현재 선진국 문턱에 서 있는 한국이 주목해야 할 문제다. 한국은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무엇보다 30년 전 일본이 가지고 있던 구조적 문제들이 현재 한국에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한국은 고령화, 여성 인력 활용 미진, 방만한 공공 부문, 낮은 생산성, 첨단 산업에서의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 이익집단의 증가, 노동 시장의 경직성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또한 낮은 사회적 신뢰, 규제의 만연, 이념에 좌우되는 경제 정책, 포퓰리즘 정치로 인한 경제 부담 가중, 양극화 심화, 과대 평가된 부동산 시장, 그리고 기술 격차를 좁히며 따라오는 중국의 추격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특히 경제 문제에 대한 정치적 의사결정이 이념에 좌우되거나 시장에 반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국민적 합의 과정도 효율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 경제 각 분야와 생산 요소 시장에서 이뤄져야 한다. 미국에서 40년 가까이 살면서 본 미국의 강점 중 하나는 '보상 체계의 건전성'이다.

미국은 사회·경제·정치·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성과 평가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으며, 성과에 따라 보상이 이뤄진다. 이것이 미국 시스템의 기본 구조다.

예를 들어 대학에서는 교수들의 연구 실적을 최근 3년의 실적으로 평가해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같은 해에 채용된 교수라도 10년, 20년이 지나면 급여가 실적에 따라 2배 이상 차이가 날 수 있다.

원로 교수에게도 예외는 없다. 다른 분야에서도 보상 체계에 일부 차이가 있더라도 기본적으로 동일한 원칙이 적용된다. 미국이 제조업 실종의 위기와 사회 불평등 심화 등의 문제를 겪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자원 배분의 효율성과 성과 기반 보상 체계를 개선하고 혁신 문화를 촉진해 왔기 때문이다.

건전한 보상 체계를 형성하면 기득권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다. 학연과 지연 등 이익집단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줄서기를 통해 경쟁을 피하려는 현상도 감소할 것이다. 특정 대학에 대한 과열된 경쟁도 줄어들며, 출산율 저하의 원인 중 하나인 교육에서의 '과열 경쟁'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생산성과 창의성을 제고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미래 산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일본은 기술 혁신을 통해 경제 회복을 시도했지만,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이 부족해 많은 혁신 기업들이 성장을 멈췄다. 한국은 이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스타트업과 혁신적인 기업들에 대한 자금 지원과 정책적 뒷받침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과거에는 외국에서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자본을 투입하여 생산을 독려하고 수출을 증가시킴으로써 경제가 발전했지만, 현재 선진국 문턱에 서 있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과거의 정책만으로는 충분한 효과를 보기 어렵다.

따라서 인공지능(AI), 배터리, 반도체 등 현재의 핵심 산업뿐만 아니라 우주항공, 생명공학, 기후산업 등 미래 산업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일본이 '잃어버린 30년' 동안 경험한 문제들을 한국도 어느 정도 겪을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렇기에 한국은 경제와 정치 시스템의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 일본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자원의 효율적 배분, 공정한 경쟁 환경 조성, 혁신적인 기업 지원, 정치적 개혁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변화를 통해 경제와 정치 시스템을 선진화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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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수 美앨라배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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