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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0 (금)

[김한수의 오마이갓]그해 통도사 겨울 달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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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22년 2월 20일 새벽 통도사 금강계단 앞 야경. 달빛이 밝아 하늘이 푸르게 보일 정도다.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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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뜨거운 추석 연휴를 보내고 계시지요? 얼마 전 조선일보 ‘만물상’에는 ‘추석(秋夕)’이 아니라 ‘하석(夏夕)’으로 불러야 할 것 같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지요. 예년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추석 보름달을 보곤 했는데, 올해는 부채질 하면서 둥근달을 보게 되네요. 뜨거운 추석 연휴의 달을 보다가 문득 2년반 전 겨울날 통도사에서 경험한 대낮처럼 밝은 달밤이 떠올랐습니다. 지루한 더위에 지친 독자 여러분께 조금이나마 시원한 기분을 전해드릴까 하여 그때 촬영한 사진 몇 장을 통해 그날 통도사 아경을 소개합니다.

지난 2022년 2월 20일 새벽 2시가 조금 넘어 잠에서 깼습니다. 경남 양산 통도사 서운암의 한 방에서였습니다. 저는 당시 통도사 서운암에 계시는 조계종 종정 성파 스님의 삶과 사상, 예술을 정리하는 대담을 진행하던 중이었습니다. 수시로 주말에 서운암에 내려가 때로는 당일, 때로는 1박 2일 머물며 스님이 살아온 이야기를 정리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날은 1박 2일 일정이었습니다. 마침 동안거(冬安居)가 끝나 서운암 선원의 방이 비어 있었습니다. 동안거는 음력으로 매년 10월 보름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석달 간 선승(禪僧)들이 선원에서 바깥 출입을 삼가며 집중 수행하는 기간입니다. 그해 2월 20일은 음력 정월 스무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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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0일 새벽 통도사 서운암 부근의 야경.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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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저녁 잠자리에 든 때문인지, 목이 말라서였는지 이유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눈을 떠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쯤이었습니다. 아직 한참 더 자야할 시간이었지만 저도 모르게 문을 열었습니다. 창밖이 대낮처럼 환했거든요. 감탄이 절로 나더군요. 중천에 높이 솟은 달은 보름달이 아님에도 얼마나 밝던지요. 길이 훤히 보이는 것은 물론 달빛에 건물과 제 그림자까지 질 정도였습니다. 영축산 자락에 걸린 흰 구름과 푸른 하늘의 구분도 가능했습니다.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달빛의 조도(照度)를 느끼기가 쉽지 않지요. 달은 그저 하늘에 떠있는 동그라미 혹은 반달 모양의 ‘도형’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인공 조명이 없는 산중에서는 달빛이 얼마나 밝은지 절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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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0일 새벽 통도사 입구 무풍한송로의 소나무 가지가 밝은 달빛에 그림자를 드리운 모습.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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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쌀쌀했지만 ‘한밤의 통도사 산책’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통도사 경내에 아무도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지요. 서운암은 통도사 큰절에서 왼편 계곡으로 올라간 위치에 있지요. 천천히 내리막길을 걸으며 달빛을 감상했습니다. ‘달이 썩 맑고 깨끗하다’는 뜻의 ‘달빛이 교교(皎皎)하다’는 표현이 무슨 의미인지 시각적으로 깨달았습니다. 개울을 따라 내려오는데, 낮에 보던 풍경과는 또다른 맛이었습니다. 낮 풍경이 채색화 같았다면, 달밤 풍경은 색깔을 걷어낸 수묵화쪽에 가까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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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0일 통도사 야경. 밤 풍경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달빛을 받은 풍경이 환하다. 가로로 누운 소나무 가지 뒤로 달빛을 받은 구름도 보인다.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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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걸었는데도 금세 통도사의 명물인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에 이르렀습니다. ‘무풍한송로’는 정말 멋진 작명(作名)입니다. ‘바람이 춤춘다’는 이 길은 통도사 산문에서 절 입구까지 약 1.4㎞에 이르는 도보 산책로인데요, 길 양쪽의 잘 생긴 소나무가 일품입니다. 성파 스님은 “일제 때 통도사 스님들이 소나무에 매달리며 버틴 끝에 베어지지 않고 버틴 나무들”이라고 하셨지요. 그 소나무들이 통행로를 따라 양쪽에서 춤을 추듯 가지를 뻗거나 드리우고 있지요. 어떤 녀석은 거의 45도 각도로 눕다시피 아슬아슬하게 서있기도 합니다. 달빛을 받으니 그 가지들이 더욱 살아움직이며 춤추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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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0일 통도사 일주문 위로 밝은 달이 떠있다.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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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바람에 뺨은 얼얼했지만 추운 줄 모르고 안복(眼福)을 누리며 천천히 걷다보니 어느새 산문 앞이더군요. 시계를 보니 거의 4시가 가까워오고 있었습니다. 새벽 예불 시간이 다 된 모양이었습니다. 산문 앞에는 차량 몇 대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새벽 4시가 되자 산문이 열리고 차량과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산문 앞에서 ‘유턴’했습니다. 큰절에서는 ‘소리’가 새벽 예불 참석자들을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범종루에서 법고(法鼓·북), 범종, 목어(木魚), 운판(雲版)이 울려 세상을 깨우고 있었습니다. 소리를 따라 각 암자와 전각에서 모인 스님들과 산문 밖에서 예불 시간에 맞춰 찾아온 불자들이 함께 예불을 드리는 모습은 엄숙하고 정갈했습니다. 그때까지도 달빛은 통도사 마당을 환히 비추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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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0일 새벽예불을 준비 중인 통도사 범종루 위에 달이 환하게 떠있다.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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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장소, 풍경도 시간과 계절이 달라지면 참 다르게 보이더군요. 제 경험으로는 그 대상이 종교 시설일 때, 새벽 시간이면 특히 감동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았습니다. 여행 계획이 있으시다면 근처의 종교 시설을 새벽에 찾아가 보시는 것도 뜻 깊은 경험이 될 듯합니다.

그날 산책을 하면서 그때그때 풍경이 눈에 띌 때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나중에 사진들을 보니 실제 눈으로 본 것보다 더 선명하고 환하게 촬영됐더군요. 저도 올여름 너무 덥고 지칠 때면 가끔 꺼내보던 사진들입니다. 올해 더위는 9월말까지 이어질 예정이라고 하니 이제 2주 남짓 남은 듯합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마지막까지 힘내서 더위 잘 이겨내시고 귀한 가을 맞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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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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