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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9 (목)

6·25 전쟁의 전세를 뒤엎은 불가능했던 '작전' [역사&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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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개시

뉴스1

인천상륙작전을 지휘 중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 (출처: Unknown author, Nutter (Army), 흑백사진(1950),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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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됐다. 북한군에 의해 남한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던 상황에서 이 작전은 기적과 같은 승리를 가져다 주며 6·25 전쟁의 전세를 완전히 뒤집었다.

앞서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은 한국을 위기에 빠뜨렸다. 남한은 북한군의 압도적인 공세에 밀려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했고,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질 경우 국가의 운명은 사실상 종말을 맞을 위기였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의 허를 찌르는 기습 상륙작전을 구상했다. 인천 상륙에 성공할 경우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후방을 교란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이 작전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인천항은 좁은 수로와 급격한 조수 간만의 차로 인해 상륙작전에 매우 불리했다. 상륙 시기를 정확히 맞추지 못하면 좌초하거나 적에게 노출될 위험이 높았다. 또한, 상륙 후 시가전이 불가피했고, 이는 많은 인명 피해와 시간 소모를 야기할 수 있었다.

북한군은 연합군의 상륙 시도를 예상하고 해안가를 철저히 경계했다. 상륙작전에는 해군, 육군, 공군 등 다양한 병력과 장비를 투입해야 했고, 이들을 효율적으로 조율하기가 어려웠다. 작전 성공을 위해서는 철저한 기밀 유지가 필요했지만, 많은 병력과 장비가 동원되는 대규모 작전인 만큼 정보 유출의 위험성도 높았다.

유엔군은 양동작전도 펼쳤다. 특히 15일 당일 학도병들을 동원해 장사상륙작전을 실시해 적군을 교란했다. 인천상륙작전은 세계해전사에서도 길이 빛날 상공을 거뒀다.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고 기세를 몰아 북진을 단행했다.

acene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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