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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수)

“45년 만에 내 나라에서” 돌아온 입양인들의 첫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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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입양인들] [1]

조선일보

왼쪽부터 최근 본지와 대면 인터뷰를 가진 해외 입양인 노지영씨와 앤 버텔슨씨, 이성수씨의 모습. 세 사람 모두 수십 년간 입양된 나라에서 지내다 중장년(中壯年)이 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래 작은 사진은 각자 입양 전후 찍은 어린 시절 사진이다. /표태준·윤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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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입양인 정울림(47·리사 스외블롬)씨는 올해 한국에서 첫 추석을 맞는다. 1977년 부산 영도에서 태어난 그는 출생 직후 고아원에 맡겨졌고 2년 뒤 스웨덴으로 입양됐다. 정씨는 작년 12월 영국인 남편과 13·11세 두 자녀와 부산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계속 한국에서 살기 위해 국적 취득을 신청한 상황이다. 정씨는 “한국인이 될 우리 가족이 한국에서 맞게 되는 첫 추석이라 뜻깊다”면서도 “아직 친부모를 만나지 못해 대가족이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고 했다.

이번 추석 가족과 한 식탁에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것이 해외 입양인 노지영(40)씨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다. 그는 1984년 뇌성마비를 가지고 태어난 직후 고아원에 맡겨졌다. 세 살에 미국으로 입양됐다. 32년 만인 2018년 한국에서 친오빠(50)와 상봉했고, 이후 한국에 정착했다. 노씨는 “오빠와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그간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웃고 떠들 계획”이라며 “가족과 명절을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게 입양인인 제게는 큰 기쁨이며 행운”이라고 했다.

6·25 전쟁 이후 가난했던 한국은 고아와 미혼모 자녀 등을 해외로 입양 보내기 시작해 지금까지 17만명 넘는 아이가 해외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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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한국에 돌아온 해외 입양인 정울림(47)씨의 현재와 어린 시절 모습. /정울림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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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중장년(中壯年)이 된 해외 입양인들의 귀향이 최근 본격화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해외 입양인이 한국에 정착했는지 정부가 집계한 공식 통계는 없다. 다만 사단법인 해외입양인연대가 한국 정착을 지원한 해외 입양인은 2018년 238명, 2020년 163명, 2022년 268명, 2024년 320명(9월 기준)으로 빠르게 증가하는 상황이다. 해외입양인연대는 보건복지부 지원을 받아 해외 입양인을 돕는 단체다.

한국말도, 한국 문화도 모르는 이들이 왜 한국행을 택하는 걸까. 본지는 추석을 앞두고 해외 입양인 20명을 인터뷰했다. 이들은 자녀가 생기거나 입양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등 중장년기에 접어들며 인생의 나침반이 한국을 향하기 시작했다고 답했다.

뇌성마비로 거동이 불편한 노지영씨는 1986년 미국 네브래스카주에 있는 한 백인 부부 집에 입양됐다. 정상적인 가정이 아니었다. 그들은 노씨를 굶기고 때리고 물고문하는 등 온갖 학대를 자행했다고 한다. 다녔던 학교에서도 따돌림과 인종차별에 시달렸다. 성인이 되자 입양 가정을 떠나 독립했고, 30대부터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가족을 찾아 나섰다. 노씨는 “미국에서 메건(Megan)이란 이름을 받았지만, 평생 제 이름 같지 않았다”며 “느낄 수 없었던 ‘소속감’이 한국에서는 느껴지더라”고 했다. 친부모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지만, 2018년 오빠를 만났고 한국에 아예 정착했다. 서울 영등포구에 살며 한국을 찾는 해외 입양인의 정착이나 가족 찾기를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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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철원


작년 말 부산에 정착한 정울림씨의 스웨덴 입양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그는 동양인은 찾아보기 어려운 인구 6000명 규모의 스웨덴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 정씨는 “학교 제 사물함에 ‘KKK(백인 우월주의 극우 단체)’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매일같이 저를 때리고 침을 뱉고 욕하고 학교 전체에서 인종차별을 당했다”고 했다. 불면증에 시달린 그는 자살 시도로 입원까지 했다.

정씨는 이런 경험이 쌓이며 모국에 대한 애착이 커졌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일러스트레이터와 만화가로 활동했고, 대학교수로 일하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두 아이가 한국인으로 살고 싶다고 얘기한 것이 한국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씨는 “어쩔 수 없이 한국을 떠나 한국말도 못 배웠지만,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 살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022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해외 입양인 인권 상황 실태 조사’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해외 입양인 623명 중 217명(33.5%)이 입양된 곳에서 학대와 방임에 시달렸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혜련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명예교수는 “입양 생활을 하며 겪은 경험이 이들의 귀향 욕구를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이들이 정서적·경제적으로 독립하게 되는 중장년층에 접어들고 있어 한국으로 돌아오는 해외 입양인은 더 빠르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평범한 가정에 입양돼 평범한 삶을 살았던 이들도 한국으로 귀향을 결심하고 있다. 1959년 태어난 앤 버텔슨(65)씨는 소아마비를 앓았다. 고아원에 맡겨진 그는 1965년 미국 뉴저지주의 한 백인 가정에 입양됐다. 양질의 교육을 받으며 석사 학위를 딴 뒤 글로벌 컨설팅 기업 ‘액센추어’에 다니며 임원까지 지냈다. 그는 은퇴 후 지난 6월부터 서울 서대문구에서 살며 한국어를 배우는 중이다. 김씨는 “한국에 살면서 제가 마땅히 가져야 했던 유산을 언젠가는 되찾고 싶다고 늘 갈망했다”고 했다. 그는 자녀 셋이 모두 직장을 가진 사회인이 되자, 마침내 한국행을 결심했다. 버텔슨씨는 “내가 죽으면 꼭 한국 땅 위에서 화장해달라고 자녀들에게 요청했다”고 말했다.

198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로 입양된 이성수(43)씨도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2014년부터 한국에 정착해 살고 있다. 요리사로 일하며 한국에서 결혼해 아들(4)을 두고 있다. 이씨는 “언젠가 한국인으로 다시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미국에서도 한국 이름을 계속 썼다”며 “입양된 미국은 저에게 여행지였을 뿐이다. 여행에서 지치면 집으로 돌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 아니냐”고 했다.

[표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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