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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수)

이마에 세종대왕 붙이고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각설이 도전해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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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적적한 사람 다 모여라

추석 맞이 ‘각설이’ 도전

챙그랑 챙그랑.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절~씨구씨구, 들어간다!” 홀로 콧노래를 부르며 양손에 쥔 엿가위를 부딪혀 보는데, 누군가 다가와 물었다. “아가씨도 각설이여?” 무심결에 “네네” 했다가 다급하게 다시 말했다. “아니, 전 기자예요.” 할아버지는 볼에 주근깨를 찍고 콧물 질질 흘리면서 “나는 기자”라고 주장하는 어떤 거지(나)를 빤히 보더니 이내 돌아섰다.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정체성 상실의 현장. 에라 모르겠다, 가위질 연습.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챙그랑 챙그랑.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다. 이곳은 ‘품바’ 공연장이다. 각설이(품바)란 지역 축제나 장터에서 공연하고 물건 팔며 삯 받는 사람을 의미한다. 상인들은 행인 발길 붙들어주니 좋고, 각설이는 돈 버니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그것이 각설이패의 생존술이다.

장터를 떠돌던 시대의 광대, 각설이.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연주면 연주, 거기다 화려한 퍼포먼스까지. 특히 추석 연휴에는 이들의 가무잡희(歌舞雜戱)를 보러 장노년층이 줄을 선다는데. “올해는 바빠서 못 간다”는 자식 전화에 “그려, 괜찮아~” 해도 속은 어디 괜찮으랴. 아들, 딸 같은 각설이 재롱에 울고 웃으며 섭섭함과 적적함을 달랜다. 독거노인에게도 각설이패는 그저 반갑기만 하다. 그래서 다녀왔다, 추석 맞이 각설이 도전기. ‘꽃거지’라 불러주오.

조선일보

‘메들리의 여왕’으로 불리는 20년차 각설이 고하자씨는 “무대에 한 번 서고 나면 전신에 힘이 빠져 움직이지도 못했다. 처음엔 살이 43kg까지 빠졌다”고 했다. 지금도 47kg. 살이 찔 새가 없단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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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이패 '최강테마기획'은 7인 1조로 활동한다. 아래 왼쪽은 "제 목소리가 맛이 갔어요~"라며 고개를 숙이는 '오월이' 언니. 오른쪽은 '천의 얼굴'을 가진 '비단이' 언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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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얕잡아 보시겄소?

지난 7일 오후 3시, 전남 영암군의 무화과 축제장. 스피커에서 들리는 “얼씨구, 절씨구” 추임새를 홀린 듯 따라가니 정말 ‘얼씨구, 절씨구. 깡통·양푼이·고하자의 각설이 품바 공연’ 현수막이 보였다. 이들은 7인 1조 각설이패인 ‘최강테마기획’. 교실 절반 크기 무대 위로 장구 2개와 심벌즈 달린 북 4개, 번쩍번쩍 화려한 조명들이 촤르르. 얼씨구 절씨구 찾았구나!

어설프게 숟가락으로 깡통 두들기는 공연, 아니다. “홍도야, 우지 마라” 긁어 부르는 트로트에 여기저기서 “옳거니!” 소리가 터지고, 장구 치는 몸짓은 나풀나풀 흥에 취한 나비. 테크노 뽕짝에 맞춰 북과 장구를 치는 대목에서는 신들린 듯 합이 맞고, 엿가위를 비틀고 비비는 동작은 차졌다. 그야말로 만능 엔터테이너인데, 이래도 얕잡아 보시겄소?

인사 꾸벅. “이렇게 끼가 필요한 줄 미처 몰랐다”고 하자 34년 차 각설이 김춘재(활동명 ‘깡통’)씨가 “걸걸” 웃었다. 그는 품바계의 대부이자 ‘신(神)의 가위손’으로 불린다. 그에게 속성으로 배운 스킬은 이렇다. 엄지를 손잡이인 고리 한쪽에 끼우고, 검지로는 가위 몸체를 고정한다. 나머지 손가락을 다른 쪽 고리에 끼운 뒤 찰박찰박 친다. 핵심은 엄지와 검지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 허리는 엉거주춤 숙이고 다리는 팔자로. “청중 앞에서 공손히 몸을 낮춘다”는 의미. 그러면서 리듬에 맞춰 두 다리를 각각 들었다, 놨다.

목에 담 올 것 같다. 묵직한 가위 무게에 팔근육이 땅긴다. 김씨가 “장구 한번 쳐 보라”고 했다. 덩, 덩, 쿵더쿵. 칠 수야 있지만 ‘맛대가리’가 없었다. 각설이패에 들어가면 마이크를 쥐기까지 약 3년이 걸린다고. 이 기간에 북과 장구 치는 법을 선배들 어깨너머로 배우거나, 아예 학원에서 익힌다.

이들은 5t 트럭에 장비와 조명 등을 싣고 전국을 유랑한다. 무대와 장비 설치 모두 직접 한다. 한국각설이품바협회에 따르면 전국에서 활동하는 품바는 약 150명. ‘메들리의 여왕’으로 불리는 20년 차 각설이 고하자씨가 “10년 전까지만 해도 엿을 늘리고 잘라가며 엿장수처럼 팔았다”며 “무대에 한 번 서고 나면 전신에 힘이 빠져 움직이지도 못했다. 처음엔 체중이 43㎏까지 빠졌다”고 했다. 지금도 47㎏. 살이 찔 틈이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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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연주면 연주, 거기다 화려한 퍼포먼스까지. 특히 추석 연휴에는 이들의 가무잡희(歌舞雜戱)를 보러 장노년층이 줄을 선다. 장구 치는 것도 어려워~.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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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얼굴로라도 웃기자

“콧물도 그려 주세요.” 이튿날, 차량 안에서 분장하며 내가 부탁했다. 차 안에는 의상 100여 벌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각설이패 공연의 핵심은 빵빵 터지는 웃음. 난 얼굴로라도 웃기고 싶었다. 거울을 보니 코피와 콧물을 쌍으로 흘리는 거렁뱅이가 서 있었다. 뭐지, 이 흡족한 기분.

초반 1~2시간은 예열 시간. 우리의 하자 언니, 무대에 오른 지 30분 만에 연예인으로 등극. 걸쭉한 목소리로 “아, 오빠 윙크하지 말고. 맘 설레게.” “거기 조카님~ 여기 앉아봐.” “잘생긴 오빠, 뭐 마셔. 그거 시뻘건… 자몽 맛있어?” 말 떨어지기 무섭게 관객 한 명이 “언니야, 목마른갑다” 하며 시뻘건 음료 두 잔을 무대에 헌납했다. 얼굴 알고 찾아온 사람은 적어도, 능수능란한 입담에 넋이 쏙~ 빠져 한번 자리에 앉은 사람은 일어날 줄 모른다네. 이것이 품바 공연의 묘미.

◇끝내 웃기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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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조유미 기자가 저질 바이브레이션을 뽐내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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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예쁘게 봐 달라” 허리를 숙여도, “진이~”를 열창해도, 엿가위를 흔들어봐도 눈 앞의 어르신들은 미동도 없었다. “저 안 웃기는 애는 뭐여, 치워!”라고 표정으로 말하는 듯했다. 앞서 언니는 능글맞게 “좀 웃어~. 안 웃고 있으면 그게 영정 사진이지!” 하며 웃음바다로 만들었으나 새파란 내가 영정 사진 운운하면 그건 그냥 패륜 아닌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모양이 안쓰러웠는지 관객이 내 손에 1만원권을 쥐여줬다. 공연을 보던 이들은 “잘 봤다” “고생한다”는 의미로 각설이에게 돈을 건넨다. 일종의 ‘관람료’인 셈. 아마 내게 “됐으니까 이거 받고 그만 내려오라”는 신호로 줬을 것이다. 죄송해서 땀이 더 났다.

저질 바이브레이션을 뽐내며 노래를 하다 에라, 심정으로 1만원권을 이마에 붙였다. 땀 덕분인지, 척. 세종대왕님, 도와주세요, 기도했으나 님은 끝내 응답하지 않았다. 난 하늘이 무너진 심정으로 무대에서 퇴장했다. 어르신들은 그제야 웃음을 되찾았다. 치어리더도 했거늘 품바로 인생의 쓴맛을 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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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중이 물건을 사 주자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던 본지 조유미 기자가 박수를 치며 좋아하고 있다. 가장 인기 많은 품목은 프로폴리스 치약이었다. 3개에 1만원.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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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시간 흥을 돋우며 행인 발길을 잡아 끄는 길거리 공연에는 주최 측에서 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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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칫솔모가 얼마나 부드러운지 입술에 살~ 문지르면 키스하는 것 같아. 외로울 때 문대 봐.” 각설이 오빠가 신명나게 꽹과리를 치다 “잠시 물건 팔겠다”며 말했다. 그게 사실인가요? 제가 사고 싶습니다(?). 어머니들은 깔깔 웃으며 자지러졌다. 각설이의 첫 번째 자질은 바로 입담. 현장은 이것보다 더 매콤한데 지면의 격조를 위해 다소 수위 조절을 했다. 어우 맵다, 매워.

각설이패는 공연 중간 치약·엿·젤리·파스 등 온갖 물건을 판다. 움직이는 다이소다. 가격은 1만원 안쪽. 정식 공연에 1시간쯤 무대에 오르면 건당 200만원부터 시작하는 공연비를 받지만, 낮 시간 흥을 돋우며 행인 발길을 잡아 끄는 길거리 공연에는 주최 측에서 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 굶지 않으려면 물건이라도 팔아야 한다. 한국각설이품바협회 회장이기도 한 김씨는 “공연비를 받는다면 물건을 팔지 않고 공연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며 “그게 유일한 바람”이라고 했다. 나도 엿과 젤리가 든 바구니 들고 총총. “언니야, 오빠야가 힘들게 공연하고 있어요~ 하나 사 주세요!”

◇언제나 엄마는 너의 편이란다

목포시 삼향읍에서 온 70대 어머님이 말했다. “아들, 추석 때 와라, 엄마 외로워서 품바 보러 왔다.” 경기도에 사는 김가(家) 진욱씨 보고 계십니까? 당장 KTX 표 끊으세요.

무대에서 내려와 어르신들께 “곧 추석인데 아들, 딸 소식은 없느냐” 묻자, “오면 좋겄지.” “아들 얼굴 까먹겠어.” “여가(영암이) 멀어서….” “아직 가타부타 말 없네.” “미안해서 오라고도 못 혀.” 같은 말이 와르르 쏟아졌다. 옆 동네 강진에 사는 황진숙(67)씨는 영암에 사는 딸(41)과 함께 공연을 보러 왔다. 추석 연휴 공연에는 이렇게 부모를 모시고 온 이도 많다고. 어르신들은 “좋겠다”고 했다. “가까이 사는 게 제일 부럽지… 같이 안 살아도 돼. 아니다, 멀리 살아도 괜찮아. 일터가 거긴데 어떡해. 그래도 보고 싶네.”

32년 차 각설이인 김수경(활동명 ‘양푼이)씨가 “부모에 대한 효는 백번, 천번을 말해도 모자람 없다”며 노래를 시작했다. “엄마를 닮았구나, 모든 걸 닮았구나. 세상을 사는 모습도. 엄마가 그랬었지, 나처럼 살지 말아라. 엄마가 그랬었지. 남 하는 것 다 해봐라. 언제나 엄마는 너의 편이란다….” 각설이패는 희로애락 모두를 선사한다. 한 50대 여성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었다.

감사 인사를 올리고 KTX를 타러 가는 길. 이번 추석 연휴에는 강원도 원주에서 공연을 한다고 했다.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하기 때문에, 어르신들이 곧 부모라는 마음을 담아 더욱 정성스럽게 무대를 꾸민다고. 추석에 아빠, 엄마 손 잡고 장터나 가볼까나. 상경 열차 안에서도 환청처럼 엿가위 소리가 들렸다. 챙그랑 챙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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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의 가위손’으로 불리는 34년 차 각설이 김춘재씨와 함께 엿가위를 흔드는 모습.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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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조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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