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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수)

[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입신양명 길 넓혔지만 줄 대야 임용 부작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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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골품제 대체한 과거제



중앙일보

이익주 역사학자


등용문(登龍門)이란 용문에 오른다는 말이다. 중국 황허강 상류에 있는 용문이라는 곳은 물살이 세서 물고기들이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는데, 만일 오르면 용이 된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그러니 ‘등용-문’이 아니라 ‘등-용문’이라고 읽고, 인재를 뽑아 쓴다는 뜻을 가진 등용(登庸, 登用)과 구별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등용문 하는 전통적인 길이 있었다. 바로 과거시험이다. 과거는 고려 초인 958년(광종 9년)에 처음 실시되어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무려 936년 동안 관리 선발 제도로서 기능했고, 수많은 인재에게 입신양명의 기회를 제공했다. 고려에서 시작한 일이 조선까지 이어진 것이 드문데, 과거는 그 드문 것 중 하나였다.



전쟁 나도 실시, 총 6330명 뽑아

지방·집안 차별, 공정성에 흠집

급제해도 절반 정도만 임용돼

관직 대물림 음서제는 더 심각

시험 선발 순기능, 조선이 계승

음서 없애고 무과로 영역 넓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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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과거 급제자에게 지급했던 합격 증서인 홍패. 고려 희종 1년(1205) 장양수에게 지급한 것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국가유산청, 이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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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일 하는 관리를 시험 쳐서 선발하는 것은 나름 역사적인 의미가 있었다. 이전처럼 세습 귀족이 아니라 변변치 못한 출신이어도 자기 능력으로 시험에 합격하면 관리가 되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과거는 중국 수나라에서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초에 광종이 처음 실시했다. 당시 광종이 호족을 억압하면서 국왕에게 충성하는 관리를 뽑기 위해 과거제를 도입했다는 것은 반쪽짜리 설명이다. 신라 골품제 아래서는 신분에 따라 관직 진출이 자동 결정되었지만, 고려 건국 후 골품제가 폐지되고 더 많은 사람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게 되자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과거’ 하면 으레 조선 후기의 말폐를 떠올리지만, 시행 초기에는 사회 변화에 대응하는 순기능이 있었다.

필체 가리고, 6단계 ‘탈진’ 시험

고려의 과거는 문장 짓기를 위주로 하는 제술업과 경전 이해를 시험하는 명경업, 그리고 의학·법학·산학(算學) 등 전문 지식을 평가하는 잡업으로 구분되었는데, 이중 제술업을 으뜸으로 쳐서 으레 과거라고 하면 제술업을 가리켰다. 제술업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우선 거주하는 군현에서 치는 향시(鄕試)부터 합격해야 했다. 그다음에는 자기 군현을 관할하는 대도시-계수관(界首官)이라고 했다-에 집결해서 또 한 번 시험을 보고, 여기 합격하면 서울로 올라가 국자감에서 예비고사를 치렀다. 국자감시에 합격해야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본시험 응시 자격이 생겼는데, 본시험은 초장·중장·종장으로 구성되어서 이것을 모두 통과해야 비로소 급제했다고 했다. 향시를 시작으로 계수관시, 국자감시, 예부시 3장 등 무려 6단계 시험을 통과해야 했으니, 이쯤 되면 급제해서 관리가 되기 전에 탈진할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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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 일생의 기념일들을 그린 평생도 가운데 ‘삼일유가(三日遊街)’. 장원급제자가 임금이 하사한 어사화(御賜花)를 꽂고 사흘 동안 친척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국가유산청, 이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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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절차가 복잡한 것은 당연히 우수한 인재를 가려 뽑기 위함이었다. 시험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공정성에도 만전을 기했다. 답안지는 이름과 인적 사항을 가리고 채점했고, 필체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서리(書吏)에게 답안지를 옮겨 적게 했다. 고려 말에 국가 시스템이 모두 무너지면서 과거의 공정성도 훼손되었지만, 그전까지 공정성을 의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고려 시대 과거는 지금의 대입 수능시험만큼이나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였으며, 첫 시행 이후 1392년 고려가 망할 때까지 한 번도 취소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몽골과의 전쟁 중에도 피난 수도 강화도에서 빠짐없이 과거가 시행되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958년부터 1392년까지 과거는 250회 실시되었고, 급제자는 총 6330명이었다(박용운, ‘고려 시대 음서제와 과거제 연구’). 이들 대부분은 골품제 아래서 관리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개중에는 말 그대로 ‘개천에서 용 난’ 사람도 있었다.

웬만한 양민은 응시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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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9년(1576년) 무과에 급제한 이순신이 받은 홍패. 고려 시대에는 무과가 없었다. 대신 승려들을 뽑는 승과가 있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국가유산청, 이익주]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우선, 신분 제한이 있어서 천민은 응시조차 할 수 없었고, 일반 양인도 웬만한 경제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도전하기 어려웠다. 생업을 돌보지 않고 기약 없는 수험생의 길로 들어서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지방 향리 이상이 과거에 응시했으며, 실제로 그 이하 신분의 합격자는 한 명도 없었다. 또 서울과 지방의 교육 여건도 확연히 달랐다. 합격자를 많이 배출하는 좋은 학교가 모두 서울에 있었으므로 지방 사람들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과거에는 처음부터 차별적 요소가 있었다. 과거에 급제한 뒤에도 차별은 계속되었다. 어려운 관문을 거쳐 급제해도 모두에게 관직이 수여되지 않았다. 고려의 과거는 임용고시가 아니라 자격고시였다. 급제해서 처음 받는 관직에는 뒤에 ‘동정(同正)’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동정이란 ‘정(正)과 같다(同)’는 뜻이지만, 사실은 같지 않았다. 동정직을 받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부름을 받아서 ‘동정’을 뗀 다음 실직(實職, 실제 관직)을 받고 근무하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급제자 중 반 정도만 실직을 받고, 나머지는 평생 동정직만 가진 채 살아야 했다는 점이다. 그럼 누가 관리로 임명되고 누구는 동정으로 늙어갔을까? 이 단계에서 가문의 배경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대대로 고위 관직을 역임한 귀족 가문 자제와 지방 향리의 자제 중에 누가 유리했을지는 불문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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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급제자 명단을 새겨 놓은 베트남 문묘의 비석. 베트남은 중국·한국과 함께 과거제를 운영하는 나라였다. 문묘는 공자를 모신 사당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국가유산청, 이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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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찬스를 쓸 수 없는 사람들은 급제한 뒤 관직을 얻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동국이상국집』으로 유명한 이규보는 과거에 급제하고 7년 동안 관직을 얻지 못하자 동년(同年, 같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 조충에게 편지를 썼다. 아버지 조영인과 장인 최선에게 관직을 부탁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가 통했는지 조·최 두 재상이 실제로 이규보를 천거했다. 『제왕운기』의 저자 이승휴도 급제 후 12년 동안 관직을 얻지 못하고 여기저기 관직을 구하는 구관시(求官詩)를 지어 보낸 끝에 겨우 실직을 받았다. 이색의 아버지 이곡은 급제 7년 후에 “한미한 가문과 궁벽한 마을 출신 선비는 자기 힘만으로 출세할 수 없다네. 반드시 귀한 자리에 오른 지기(知己)가 끌어당겨 주어야만 굽히고 있다가 펼 수 있고 움츠리고 있다가 뛸 수 있는 법이라네”라고 시작해서 구구절절 부탁하는 편지를 먼저 실직을 받은 동년들에게 썼다. 이들은 이렇게 해서라도 관직에 오르고 이름을 남길 수 있었지만, 훨씬 많은 사람이 그 어려운 과거의 관문을 뚫고도 평생 시골에서 동정직만 가진 채 살다 죽었다.

하지만 고려의 과거가 아무리 불공정하다 해도 또 하나의 등용문, 음서(蔭敍)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음서란 5품 이상 고위 관리의 후손에게 관직을 수여하는 제도였다. 예를 들어, 현직 재상은 아들·손자·생질 중 한 사람에게 정8품 동정직을 줄 수 있었다.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그 어렵게 얻는 종9품 동정직보다 2등급 높은 관직을 아버지·할아버지·삼촌 덕분에 거저 얻는 것이니 얼마나 큰 특혜인가. 게다가 한 번 기회에 한 사람에게 관직을 줄 수 있었지만,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차례 기회가 있었으므로 사실상 아들·손자·생질 모두에게 관직을 줄 수 있었다. 음서로 동정직을 받으면 변변찮은 집안의 과거 급제자보다 실직을 받을 가능성이 오히려 높았고, 특히 10대 어린 나이부터 관력을 쌓아 별 탈 없으면 무난히 5품 이상으로 승진해서 다음 세대에 음서 혜택을 내려줄 수 있었다. 이렇게 고려의 귀족들은 관직을 매개로 특권을 세습했다.

음서로 등용 후 과거 다시 치르기도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되어도 승진에는 하등 불이익이 없었다. 그런데도 고려에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음서로 쉽게 관리가 되는 것을 떳떳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음서로 관리가 된 뒤, 다시 과거에 도전했다. 국가에서는 관리들이 일 안 하고 과거 준비에 몰두하는 풍조를 막기 위해 6품이 되면 과거 응시를 불허했다. 그러자 6품으로 승진하게 되면 관직에서 물러나 과거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신분 차이, 빈부 차이를 당연하게 생각했던 고려에서도 집안 찬스로 출세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자기 능력을 인정받는 것을 영예롭게 여기는 기풍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에서는 음서가 관리 충원 방식으로서의 의미를 거의 상실했다. 범위가 많이 축소되었고, 실제 음서로 관리가 된 사람이 고위 관직에 오른 사례도 없다. 대신 과거는 고려보다 훨씬 자주 시행되고 더 많은 합격자를 배출했다. 고려에는 없던 무과도 신설되어 능력 있는 무신을 선발했다. 가문의 배경보다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것이 역사의 발전 방향이었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용문에 오를 기회를 찾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능력만을 앞세워 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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