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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수)

[이윤정의 판앤펀] 사투리와 교포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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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이윤정 문화 칼럼니스트


“우리 딸래미 쪼매 있다가 신랑 따라 일본 갑니더. 지가 짜달시리 뭐를 해줄 형편은 못되고 우리 땅 쌀 맛이라도 뵈 주고 싶습니더.”

애플TV 드라마 ‘파친코’(시즌1 2022년, 시즌2 2024년)에 처음부터 빠져들 수 있었던 이유는 첫 화부터 주인공 선자 가족들이 보여준 부산 영도 사투리의 농도 때문이었다. ‘짜달시리’ 같은 토박이 단어의 선택도 그렇지만 배우 정인지(사진)와 가족들이 구사하는 완벽한 억양은 ‘미드’에서 기대했던 수준을 훌쩍 넘었다. 그동안 서울 배우들이 흉내 내는 경상도 억양에 이물감을 느끼던 나 같은 ‘원주민’ 출신도 심지 굳은 경상도 여자의 속내를 꾹꾹 담은 젊은 배우 김민하의 사투리 구사에 감탄했다. ‘파친코’에는 한국어 영어 일본어 3개 국어와 무려 10개의 방언이 등장한다. 일본 오사카에 주인공이 도착하는 장면 뒤로 “재기 재기 오라. 꼭 붙어 오라이” 같은 제주도 방언을 배경으로 깔아 당시 제주도민이 대거 이주했던 역사를 고증한다. 완벽한 사투리 구사는 완벽한 감정을 전달한다. 언어에 대한 의구심이 사라지니 보는 사람은 드라마에 더 흔쾌히 몰입하게 된다.



완벽한 사투리 완벽한 감정 전달

콘텐트가 세계의 주목 받을수록

언어의 미묘한 뉘앙스 살려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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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글로브와 에미상을 받은 넷플릭스 ‘성난 사람들’(2023년)에서도 꼼꼼한 교포 언어들의 배치가 돋보였다. 이민 2세대 형제 중 큰아들은 영어 단어를 섞긴 하지만 한국말을 할 줄 알고, 둘째 아들은 영어로만 말한다. 1세대 부모들은 큰아들과 대부분 한국말로 대화하지만 “암쏘 프라우드 오뷰(I’m so proud of you)” “유 룩 나이스(You look nice)” 같은 짧은 문장들은 영어로 말한다. 교포 가정에서 딱 본 듯한 대화와 상황이 적당한 어눌함 혹은 능숙함으로 펼쳐지며 드라마의 신뢰도를 높인다.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이성진 감독이 자신의 교포생활 언어를 충실히 반영했기 때문일 것이다.

데뷔작으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르고 전 세계 수십 개 영화제에서 수상한 ‘패스트 라이브즈’(2023년)는 언어 구사만 놓고 보면 분명 아쉬운 측면이 있어 보였다. 세계 영화계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반론을 제기하는 리뷰들 대부분이 영화 속 한국말과 영어의 사용에 대해 말한다. 남자 주인공 유태오는 한국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30대 남자 역할인데 한국말이 자연스럽지 않다. 그레타 리가 연기하는 여주인공은 열두 살 때까지 한국에서 살다 미국으로 이민한 사람이다. ‘당근’ ‘또라이’ ‘장난 아니지’같은 단어들을 아직 사용할 정도의 한국말 실력이라는 극 중 설정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남자가 “와~ 너다” 한다거나 “언제쯤 나를 만나러 뉴욕에 오는 게 가능해?” 같은 번역 투의 문장이다. 한국의 고학력 엘리트인 유태오 역은 미국에 가서 “아유 헝그리” 같은 간단한 영어도 못 알아듣는다. 주인공처럼 열두 살에 캐나다로 이민 간 감독 셀린 송의 능숙한 한국말 솜씨에 비추어 본다면 자전적인듯한 작가 캐릭터로 그려진 여주인공의 한국말은 확실히 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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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상과 작품상 후보에 오른 셀린 송 감독의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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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 버린 시간과 인연에 대한 아련한 감정을 빼어난 화면과 음악으로 그려낸 이 아름다운 영화는 둘의 대사가 나올 때마다 “진짜 저렇게 이야기할까?” 질문을 떠올리게 하여 몰입을 방해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차라리 외국인이었다면 온전히 아름다움 속에 푹 빠질 수 있을 테니 더 좋았겠다 싶었다. 어설픈 경상도 사투리가 구사되는 영화를 볼 때 저게 안 들리는 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처럼 말이다.

사실 사투리나 교포 한국어의 리얼리티 같은 문제는 예전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을 한 셈이다. 1970~80년대엔 사투리가 핵심인 ‘토지’ 드라마에서 서희와 최참판 일가 등 주역들은 모두 표준말을 쓰고 조연들만 사투리를 쓰도록 하던 시절도 있었다. 재미 한인 역할의 경우 아시아 국가 출신 배우나 미국 태생으로 한국말을 한마디도 못 하는 한인 배우가 연기하는 너무나 어색한 한국어를 보면서도 머릿속에서 다 걸러서 듣는 일이 당연했다. 이런 세세한 지적이 가능해진 것은 미디어 속 언어의 리얼리티가 나아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투리와 지역성, 다양성의 가치에 눈뜬 사람들이 ‘사투리 콘텐트’에 열광하는 트렌드를 만들어 내면서 점점 더 사투리의 리얼리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밖을 보면 이제는 한국의, 혹은 한국 출신의 작가, 배우의 작품을 세계가 주목하고 더 많은 작품을 기다리는 때다. 한국 출신의 세계인들이 만들어 내는 작품은 각국의 지역성과 한국인의 정체성이 맞닿는 내용일 가능성이 높다. 그 경우 양국 언어의 뉘앙스를 미묘하게 살리는 리얼리티는 점점 더 세세하게 필요해질 것이다. 또 배우들은 더 많은 ‘미국 영화’에서 다양한 수준의 영어 대사를 요구받을 것이다. 관객이 걸러 듣지 않아도, 감안하고 보지 않아도 될 만큼 한국말과 영어의 리얼리티에 대한 눈높이를 미리 높여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윤정 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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