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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수)

[에디터의 창]흰 수건을 던질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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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여론에 둔감한 윤석열 대통령이라도 지금쯤 눈치챘을 것이다. 자신이 망토를 두르지 않았음을. 그러나 깨달음은 너무 늦게 왔다. 주변을 둘러봐도 망토는커녕 나뭇잎 한 장 찾을 수 없다. 바닥으로 추락한 지지율, 느슨해진 국정 장악력을 회복할 길은 없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창피함과 당황스러움을 감내하기보다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정신승리를 택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스스로를 개혁 완성을 위해 험한 길도 마다 않는 지도자로 포장한 듯하다.

윤 대통령이 틈날 때마다 “사회 내부에 암약하는 반국가세력에 맞서 나라를 지키자”고 주장하는 것이 정신승리의 징후다. 최근엔 ‘반대한민국세력’이라는 알쏭달쏭한 말까지 등장했다. 윤 대통령이 말하는 반국가세력이나 반대한민국세력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이나 세력들을 지칭한 것일 터다. 짐작건대 온갖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맞서 묵묵히 국정수행을 하는 자신을 불순한 세력들이 흔들고 있다는 게 대통령의 생각일 것이다. ‘숭고한 지도자’ 서사를 완성하려면, 반대편은 반국가세력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나.

그러나 이런 발상은 어처구니없고 허황되다. 자신에 맞서면 반국가세력이라 함은 ‘짐은 곧 국가다’라는 사고와 무엇이 다른가. 손바닥에 그려진 ‘왕’자를 봤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윤 대통령은 각종 카르텔들을 뿌리 뽑겠다고 했다. 지금의 반국가세력은 대통령이 지목했던 카르텔들이 똘똘 뭉쳐 덩어리를 키운 것인가. 윤 대통령은 반국가세력이 누구냐는 질문에 “북한을 추종하면서 대한민국 정체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사회주의가 몰락한 게 언제인데, 여태껏 이념·체제 타령을 하나. 대통령의 지적 수준이 이 정도라고 믿고 싶지 않다.

여하튼 윤 대통령을 비판하는 글을 적잖이 썼던 나 역시 반국가세력의 일원이 됐을 것 같다. 칼럼을 쓸 때마다 삼청교육대로 끌려가 목봉 들고 ‘언론정화’를 외치게 되는 것 아니냐는 농담도 들었다. 그렇다면 국민 10명 중 7~8명이 대통령을 비판하는데, 이들도 반국가세력일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반국가세력’ 해시태그 운동이라도 제안하고 싶다. 안드로메다에 있는 윤 대통령의 정신세계가 지구로 귀환할 것을 촉구하는 차원에서 말이다. 무엇보다 툭하면 압수수색하고, 전직 대통령 가족까지 탈탈 터는 검찰국가에서 반국가세력이 존재했다면 주동자는 물론 사돈의 팔촌까지 벌써 쇠고랑을 찼을 것이다.

나라를 어지럽히고 국민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게 반국가세력이라면 이는 대통령과 집권세력에 해당된다. 무지한 사람도 신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책임 있는 자리에 올라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이면 대다수가 고통받는다. 일단 지르고 보는 무데뽀 대통령, 잘한다며 박수치는 간신들이 국정 혼란의 주범이다. 특히 장기적 대책 없이 의대 증원 문제를 건드려 의료체계를 붕괴시키고, 국민 생명을 위협하고, 입시 혼란까지 초래한 것은 무능한 대통령의 국정 혼란 사례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이쯤 되면 누가 반국가세력인지 자명해진다.

최근 윤 대통령이 한동훈 대표와 친한계 최고위원들을 쏙 빼놓은 채 친윤계 의원들만 모아놓고 만찬을 했다고 한다.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 듣고 싶은 말만 들으면서, 어쩌면 폭탄주 몇잔 곁들이면서 대통령은 잠시나마 위로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눈을 가리고, 땅에 머리를 처박아도 이 국면은 지나가지 않는다. 의료대란이 수습되지 않고 붕괴로 이어진다면 정권 몰락의 결정타가 될 수 있다.

분명히 해둘 게 있다. 윤 대통령은 개혁을 위해 고난의 길을 걷는 지도자가 결코 아니다. 무능, 무책임, 내로남불, 대통령답지 못한 언행으로 여론의 심판대에 선 무도하고 무력한 권력자일 뿐이다. 대통령은 스스로를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넣고, 국민 탓을 하며 잔뜩 인상을 쓰고 있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국민 생명을 지키지 못한 것, 국정 혼란으로 국민에게 고통을 안긴 것, 자신과 주변 관리에 실패한 것 등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채 상병 특검과 김건희 특검도 수용해야 한다. 현실을 회피할수록 대통령은 더 고립되고, 앞으로 닥칠 고난의 크기는 더 커질 것이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이 눈을 질끈 감는다면 집권여당이라도 “뭐라도 걸치라”고 말해줘야 한다. 망토를 대신할 흰 수건이라도 건네줘라. 실체도 불분명한 반국가세력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윤 대통령이 폭주를 멈추도록 강제하는 게 나라를 구하는 길이다.

경향신문

이용욱 정치에디터


이용욱 정치에디터 woo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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