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9.17 (화)

[김한수의 오마이갓] ‘통장 잔액 133원’...순교 성지 신부의 기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일보

문학진 화백의 작품으로 혜화동성당이 소장한〈103위 순교 성인화〉. 한국 천주교는 선교사가 아닌 자생적 신자들에 의해 시작됐으며 수많은 순교자들이 희생됐고, 전국에 수많은 순교 성지가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순교 성지에 영성 담아내려면 ‘기도하는 성지’ 돼야 합니다.’

최근 ‘가톨릭평화신문’에 실린 편지 형식의 글은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천주교가 ‘순교자 성월(聖月)’로 기념하는 9월을 맞아 실린 글입니다. 한 순교 성지 담당 사제가 익명으로 가톨릭평화신문 기자와 인터뷰 한 내용을 편지 형식으로 재구성했는데, 현재의 순교 성지 순례 문화를 곱씹어보는 내용입니다.

작은 제목들은 이렇습니다. ‘영적인 거룩함을 담아내는 데에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200년 전 초대교회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가난하고 소박하고 단순하고 검소한 성지를 만들고 싶습니다. 억 단위의 돈을 들여 성지를 경쟁적으로 개발하는 일은 그만해야 합니다. 볼 것 없고, 먹을 것 없고, 놀 것 없는 성지에서 할 것이라고는 기도밖에 없는 성지로 만들고 싶은 바람입니다.’ 대략 어떤 내용인지 짐작이 가시지요?

조선일보

가톨릭평화신문 9월 1일자에 실린 순교 성지 담당 사제의 편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편지는 “저는 200년 된 교우촌(敎友村)에서 나고 자랐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교우촌’이란 천주교 전래 초기부터 신자들이 모여 살던 곳을 말합니다. 특히 천주교가 박해받던 시기에는 외딴 산골로 숨어 들어가 숯을 굽거나 옹기를 구워 팔아 생활했지요. 김수환 추기경이 호를 ‘옹기’라고 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교우촌 출신들은 ‘구(舊) 교우’ 즉 보통 4~5대 선조부터 신앙생활을 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제의 고향은 아침 저녁으로 기도 소리가 울려 퍼지고, 신앙 속에서 교리에 의지해 사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도 많이 배출했다지요. “그런데 공소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고 텔레비전이 들어오면서 묵주 대신 핸드폰을 들고 잠을 자는 시대가 됐습니다. 박해 시대보다 신앙생활을 하기가 더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지요.”

사제는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성지에서 “수많은 순교자가 죽음을 위해 걸었던 순례길을 500번은 걸어볼 계획”이라며 “걸을수록 길이 편안해지고, 분심이 덜 들고,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고 익숙해지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이 더 깊이 다가옵니다”라고 했습니다.

편지는 조선시대 박해를 당하던 순교자들의 처참한 상황을 상기시킵니다. 죄수들을 입교시켜 함께 참수당한 순교 성인, 칼과 족쇄를 찬 채 감옥에 갇혀 던져주는 볏단으로 새끼를 꼬아 끼니를 얻어먹던 순교자들, 고문 당하고 배교를 강요당하던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적었습니다. 그러면서 순교자들의 마음을 되새깁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의탁하며 하느님의 뜻이려니 생각했을 것입니다. 믿음을 갖게 된 것, 감옥에 간 것, 모진 고문을 당한 것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기에 원망하는 마음 없이 하느님께 의탁했을 것입니다.”

구교우 집안 출신에 순교 성지를 담당하는 이 사제는 참 순수하고 고집(?)도 센 분인 것 같습니다. 자신이 담당하는 성지에서는 미사에서 봉헌 바구니를 없앴답니다. 미사 때 헌금을 걷지 않는다는 뜻이죠. 게다가 순례자들에게는 밥(보통은 점심)을 무료로 제공한답니다. 밥값 따지지 않고 몇 명이 식사했는지 계산하지 않는답니다. 굶어 죽기도 한 순교 성인들의 애절함을 달래기 위해서랍니다. 그 다음 대목은 읽다가 저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습니다. “오늘은 성지 계좌의 통장 잔액이 133원으로 찍혔습니다.” 헌금도 걷지 않고 식사비도 받지 않으니 통장이 마를 수 밖에 없겠지요. 편지는 이어집니다. “133원에 무슨 욕심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가난하고 소박함에서 오는 안락함을 느낍니다. 성지가 소란할수록 영성이 사라질까 두렵습니다.” 그는 성지에 필요한 가구나 물품은 얻어 오거나 당근마켓에서 중고로 구입했다고 합니다.

그가 이런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성지다움’에 대한 고민 때문인 듯합니다. 그가 꿈꾸는 순교 성지는 ‘기도하는 성지’입니다. 그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성지는 거룩함을 담아내야 합니다. 영적인 거룩함을 담아내는 데에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200년 전 초대교회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가난하고 단순하고 소박하고 검소한 성지를 만들고 싶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순교자들이 숨어서 울었던 이곳의 이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거액을 들여 성지를 개발하는 일에 대해서는 경계하며 “볼 것 없고, 먹을 것 없고, 놀 것 없는 성지에서 할 것이라고는 기도밖에 없는 성지로 만들고 싶은 바람”이라고 적었습니다. “홍보와 광고로 사람이 몰려오고, 사람들이 몰려오면 돈이 모이고, 돈이 모이면 성지를 더 개발해야 하고. 유명해질수록 성지는 더 시끄러워지겠지요.”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순례길을 오르며 묵묵히 기도합니다. 성지에 오는 이들이 순교자들의 거룩함을 볼 수 있기를. 나부터 순교자를 닮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김한수의 오마이갓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80904

[김한수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