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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7 (화)

퇴직연금, 기금형이 답이다[금융시장 돋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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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연금 개혁 3대 원칙 아래 공적연금과 함께 퇴직연금의 역할 강화 방안도 발표됐다. 점진적 가입 의무화, 중도인출요건 강화, 수익률 제고를 위한 일임형 도입과 디폴트옵션 개선이 그 내용이다. 솔직히 내용이 새롭다기보다 그간 추진한 제도개선의 연장선이다.

이데일리

근본적인 물음은 이 정도의 대책으로 제도의 체질이 바뀌고 노후소득보장이 강화될까 하는 점이다. 물론 도입 20년이 된 퇴직연금은 그간 외형적으론 크게 성장했다. 전체 적립금이 382조원, 650만 가입자의 평균 적립액은 6000만원 정도로 상당하다. 공적연금을 보완하는 보충연금 위상은 갖추었다고 본다. 그러나 제도의 비효율이 만들어내는 노후소득의 기회손실은 매우 크다. 10년 장기수익률 2%와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 장기 수익률(약 6% 내외) 격차는 그대로 급여율 격차로 이어진다. 보험료는 국민연금(9%)과 비슷(8.3%)한데 퇴직연금 소득대체율은 25년 납입 기준으로 10% 초중반에 불과해 국민연금(25%)보다 10%포인트(p) 정도 낮다. 이만큼이 계약형 퇴직연금이 자본시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발생한 노후소득보장의 기회손실이며 수익률 개선으로 메워야 할 부분이다.

10년 동안의 가입률 정체현상이나 높은 일시금 수령 비중 또한 따지고 보면 낮은 수익률, 낮은 소득대체율과 무관치 않다. 퇴직연금은 퇴직급여의 한 방식일 뿐이다. 퇴직연금이 아닌 퇴직금을 받아도 된다. 일시적으로 악화하는 임금 체불 문제를 논외로 한다면 퇴직금과 퇴직연금 중 하나를 선택하는 기준은 결국 수익률이다. 퇴직연금 수익률이 퇴직금 수익률(임금상승률)보다 높아져야 가입 의무화도 시장의 힘으로 갈등 없이 진행될 수 있다.

낮은 연금 수령은 이직으로 일시 누수(leakage)된 연금자산이 환류하지 않은 결과다. 적립금의 가입자 평균은 6000만원인데 정작 퇴직자의 일시금 평균은 2000만원에 불과할 정도로 누수가 심각하다. 이직 시 연금자산 강제 현금화, 개인형퇴직연금(IRP)의 자유로운 해지 허용 등이 누수의 제도적 원인이지만, 누수 자금이 연금계좌로 환류하지 않은 것은 결국 낮은 수익률 때문이다. 10월부터 퇴직연금 실물이전이 확대된다고 하니 연금자산 누수는 줄고 투자의 연속성이 확보되는 만큼 수익률에 대한 근로자의 민감도는 더 커질 것이다. 결국 퇴직연금의 가입·운용·연금화는 별개가 아니라 수익률 개선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 20년간 다양한 수익률 제고 정책이 추진됐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다. 정책의 틀을 바꾸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시장경제는 민간부문이 공공부문보다 높은 효율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민간의 퇴직연금이 공공의 국민연금이나 직역연금보다 성과가 낮은 것은 개별정책보다 지배구조 문제와 관련 있다. 공적연금은 민간 퇴직연금과 달리 전문적인 운용조직을 가지고 수익률 경쟁에 전념할 수 있는 운용지배구조가 갖춰졌다. 거꾸로 지금의 계약형 구조를 그대로 둔 채 공적연금에 적립금을 운용하라고 하면 성과는 기존 연금사업자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문제는 개별 역량이 아니라 운용지배구조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퇴직연금은 운용의 전문성과 수탁자의무가 느슨한 계약형 지배구조를 20년째 유지하고 있다. 퇴직연금의 성패는 근로복지 증진을 위해 금융시장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달렸는데, 계약형 제도는 여기에 적합한 지배구조가 아니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복잡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다. 국민연금이나 직역연금, 해외 유수의 퇴직연금들처럼 전문적인 운용조직을 만들자는 것이다. 기금형 제도가 도입되면 퇴직연금 생태계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수탁자책임이 강화되며 수익률이 최고의 가치가 될 것이다. 지금과 같은 형식화된 DB 적립금운용위원회나 대표상품 성격의 복잡한 한국형 디폴트옵션은 지속되기 어렵다. 401(k) 기준으로 보면 국내의 많은 디폴트옵션 상품들, 특히 저위험상품들은 수탁자책임과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기금형이 최고의 디폴트옵션 개선 정책인 것이다.

기금형이 도입되면 퇴직연금은 대형화 경쟁 속에 전문적인 자산배분이 가능해질 것이다. 호주 퇴직연금의 경쟁력은 활발한 기금 간 인수합병(M&A)과 무관치 않다. 새로 집권한 영국 노동당 정부는 퇴직연금기금 대형화 유도를 위해 호주와 캐나다 연금 모델을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다. 미국도 시큐어(SECURE) 2.0 개혁을 통해 복수사업자 401(k) 규제를 완화하는 등 대형화에 시동을 걸고 있다. 퇴직연금의 수탁자책임 강화와 대형화가 바탕이 돼야 디폴트옵션이든 일임형이든 제대로 정책효과를 낼 수 있다.

예상된 것이지만 국내 최초 기금형인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이 짧은 업력에도 운용체계와 수익률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퇴직연금 20년 저수익률 원인이 계약형 지배구조임을 방증하고 있다.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은 재정지원 예산제약과 민간 연금사업자와의 시장마찰 등 확장성에 한계가 있는 만큼, 이제는 민간부문에 기금형 제도를 도입해야 할 시점이다. 공공 성격의 중소기업퇴직연금은 중소기업에 특화해 서비스를 제공하고 대기업과 전문직 등에 대해서는 민간 기금형 제도를 도입해 수익률로 진검승부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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