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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7 (화)

[정동칼럼]우리들의 일그러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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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검찰 수사심의위원회(수심위)는 김건희 여사의 명품가방 수수 의혹에 대해 불기소 권고를 결정했다. 청탁금지법 위반, 특정범죄가중법상 알선수재, 변호사법 위반, 뇌물수수, 직권남용, 증거인멸 등 6개 혐의에 대해 모두 무혐의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검찰총장이 최종 처분을 내리면 사건은 마무리된다. 최재영 목사가 가방을 전달한 지 2년 만이며, 김 여사가 고발된 지 9개월 만이다.

하지만 정치적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혹시나’와 ‘역시나’의 우연은 필연이 되었고, 윤석열 정부의 정당성은 또 한번 훼손되었다. 수심위는 150∼300명의 외부 전문가 위원 중 무작위로 선발된 15명으로 구성된다. ‘혹시나’하는 기대를 가능케 한 부분이다. 그러나 일부 혐의는 수사가 더 필요하다는 소수 의견이 있었지만, 결론은 위원 15인 전원의 만장일치로 내려졌다. 검찰 수사팀의 결정과 동일하다.

야권의 반발은 거세다. 황정아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수심위는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진행된 짜고 치는 고스톱에 불과하다”며 “면죄부 처분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평가했다. 여권에서도 “법률적으로만 무혐의”라는 지적이 나온다. 정치적·도덕적·국민적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말이다.

대통령의 직무와 관련성이 없다는 것이 불기소 결정의 주요 근거 중 하나다. 하지만 한국의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이다. 사실상 모든 영역에 개입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자리다. 김 여사에게 뇌물을 주는 건 그가 개인 김건희이기 때문이 아니라 대통령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김 여사에게 고가의 선물을 주는 것은 특정한 대가가 없더라도 그 자체로 뇌물수수다. 전직 대통령들에게 적용된 포괄적 뇌물수수는 왜 이번에만 피해 가는 것일까. 전직이 아니라 현직이라 그런가.

가방을 전달한 최재영 목사를 부르지 않고 김 여사 측의 해명만 들은 수심위는 상식적으로 봐도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 ‘법리적으로 따지기 쉽지 않은 사안들이 다수여서 불기소로 결론이 날 것’이라는 한 검찰 고위 관계자의 예상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증거가 확실함에도 법리적으로 따지기 어렵다면, 기소한 후 그 법리적 판단을 재판부에 맡겼어야 한다.

기소를 하더라도 재판 과정에서 검찰이 과연 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도 의문이다. 변호사보다 검찰이 더 범인을 옹호하는 희극이 연출될 것 같다. 검찰 수사팀의 무혐의 처리는 이런 촌극을 미리 피하기 위한 약빠른 처신일 수도 있다. 수심위 위원들은 적극적으로 권력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면 권력 앞에 한껏 몸을 낮춘 나약한 지식인을 떠올리게 한다. 김 여사의 논문 표절에 대한 숙명여대와 국민대 교수들의 행위를 생각하면 새로운 일도 아니다.

1990년대 초반 이탈리아의 마니뿔리테 정풍운동이 새삼 부럽다. 부패한 반세기 기민당 정권의 붕괴는 디 피에트로(Di Pietro) 검사의 용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밀라노의 한 지방 검사에 불과했지만, 권력의 부패와 비리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법 앞에는 말 그대로 성역이 없었다. 디 피에트로에서 시작된 부패 정치인 수사는 결국 전현직 고위 정치인까지 줄줄이 재판정에 세웠고, 이로써 이탈리아는 환골탈태할 수 있었다. 그 정점인 1993년 이후 이탈리아는 헌법이 바뀌지 않았음에도 ‘제2공화국’으로 불리기까지 한다. 디 피에트로는 이탈리아인의 진정한 영웅이었다.

명품가방 수수 사건이 마무리되더라도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은 여전히 불씨로 남아 있다. 김건희 여사는 이 사건에서 전주(錢主) 역할을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김 여사와 함께 전주 역할을 한 혐의를 받는 손모씨 항소심에서 검찰은 징역 3년에 벌금 50억원을 구형했다. 동일한 판단을 김 여사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까. 검찰에게는 마지막 남은 기회이고, 대통령에게도 마지막 기회가 될지 모른다. 부패한 측근은 권력을 좀먹는다. 그래서 권력의 부패와 몰락은 측근에서 비롯된다고 하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한때는 디 페이트로와 비교되는 강단 있는 검사였고 검찰총장이었다. 적지 않은 국민이 우리들의 영웅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엄석대’처럼 그것도 착각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 그것만은 인정하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너무 비참해지니까. 그런데 권력을 장악한 그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대통령’이 되었다. 그때 그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에 충성했고, 이제 그 조직은 그에게 충성한다. 훗날 역사는 다시 기록할 것이다. ‘그는 조직에 충성했으나, 그 조직은 권력에 충성했다’고.

경향신문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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