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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7 (화)

[詩想과 세상]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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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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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윤동주(1917~1945)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에 윤동주의 이름은 단연 빛나고 오롯하다. 그의 유고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래 제목은 <병원>이었다고 한다. 시인은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라며 당시 ‘육첩방’이 된 나라를 ‘병원’으로 보았다. 병원 뒤뜰에는 얼굴을 가린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하고 있다.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에게서 자신과 닮은 슬픔을 본다. 시인은 자신도 모르는 병에 걸려 병원에 왔는데,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르고,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여자가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가슴에 안고 병실로 들어간다.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보는 것이다. 이는 타인의 고통에서 나의 “지나친 피로”와 “시련”을 보고, 나와 다르지 않은 그 고통 속에 내 몸을 담는 것이다. 지금 세상은 온통 병을 앓는 사람들로 빽빽하다. 모두가 병중인데, 병명을 모른다고 한다. 응급실에는 의사가 없고, 우린 아프기도 겁나는 시절을 지나고 있다. 이 가을, 수심을 모르는 바다처럼, 깊어가는 하늘처럼 우리도 푸르게 회복할 수 있기를.

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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