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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6 (월)

[단독] 실명 위기인데 스무 번 '전화 뺑뺑이'… 초응급 '대동맥박리'도 4시간 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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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대원들이 전하는 응급실 뺑뺑이]
"출동 못한 채 전화 붙들고 병원부터 수배"
이 병원 저 병원 오가는 사례도 계속 반복
구급차는 거부, 내원 환자는 받는 '기현상'
한국일보

3일 119 구급대원들이 서울 시내의 한 대학병원 응급의료센터로 환자를 이송하고 있다. 정다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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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대원 A씨는 지난 1일 출동 경험을 떠올리면 지금도 착잡하다. "안약인 줄 알고 눈에 순간접착제를 넣었다"는 신고를 받고, 서울 강남에 있는 응급환자 집에 즉시 도착하니 40대 여성이 한쪽 눈을 부여잡은 채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위아래 눈꺼풀이 붙어 눈 상태를 확인할 수도 없었다.

각막이 손상됐다면 실명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급한 상황. 일단 응급처치로 환자에게 두 눈을 다 감으라고 했다. 두 눈동자는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데 문제없는 다른 쪽 눈을 뜰 경우 다친 쪽 눈동자까지 이동해 상태가 더 악화될 수 있어서다. 이어 A씨와 동료는 환자를 안정시킨 뒤 서울 내 대형 병원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응급실 병상 정보가 공개된 구급대용 애플리케이션(앱)에 안과 응급 진료가 가능하다고 나온 병원들부터 전화를 돌렸지만 "받을 수 없다"는 답변만 반복됐다.

출동한 지 1시간이 지났지만 환자를 구급차에 태우지도 못한 채 20곳 넘는 병원을 상대로 전화만 붙잡고 있었다. 인천, 경기 등 수도권 일대의 다른 병원들도 "어렵다"고만 했다. 이송 조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튿날 외래 진료를 받아야 하는데 중증도 분류체계 레벨2(생명 혹은 사지, 신체기능에 잠재적 위협이 있어 빠른 치료가 필요한 경우)에 해당하는 환자를 그대로 방치할 순 없었다. 할 수 없이 A씨는 마지막으로 환자에게 "내원을 하면 응급실에서 받아줄지 모른다"고 안내했다. 병원에서 구급대는 거절하지만 환자가 직접 가면 받아준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사정을 설명한 뒤 환자를 보호자에게 인계하고 귀소한 A씨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환자가 무사히 응급실에서 치료받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수십 통 전화에도 이송 어려워

한국일보

현직 구급대원들이 단체 대화방에서 병원 재이송으로 겪는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환자를 이송하기 위해 병원 앞에서 수시간을 기다렸다는 경험담과 약물중독(DI) 환자는 서울 내 응급실에선 받지 않는다는 등 현장에서 구급대원들이 겪는 애로 사항이 담겨 있다. 독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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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 넘게 이어진 의정 갈등으로 의료 공백이 길어지면서, 응급 진료가 가능한 병원을 찾아 돌아다니는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가 계속되고 있다. 3일 정부는 비상진료 대응 관련 2일 차 브리핑을 열고 최근 응급실 운영 차질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2월 전공의 집단 이탈에서 비롯된 오랜 문제라며 효율적인 운영이 가능한 상태라고 재차 강조했다. 그러나 직접 환자를 실어 나르는 구급대원들의 목소리는 다르다. 응급실 도착 전 '전화 뺑뺑이'로 시간을 허비하다 골든타임을 놓치거나 끝내 보호자 인계로 종결하는 경우가 되풀이되고 있다고 토로한다.

구급대원 B씨는 성형수술 부위가 지혈되지 않는 20대 남성 환자를 최근 서울 강남에서 이송하기 위해 30군데의 수도권 병원에 전화를 돌렸다. 그는 "지병이 있는 환자라 혈전용해제도 복용 중이라 응급 처치가 필요했다"고 당시 급박한 상황을 전했다. 그러나 2차 병원에선 상처가 깊다고 돌려보내고, 3차 병원에선 이비인후과 전문의가 없다고 거절했다. 급기야 보호자도 구급대원들과 함께 1시간 30분가량 전화를 돌렸고, 집에서 100㎞ 떨어진 충남 천안의 한 병원으로 이송했다.

한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가 다른 곳으로 여러 차례 이동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구급대원 C씨는 지난달 중순 복통을 호소하는 60대 환자를 여러 차례 '전화 뺑뺑이' 끝에 경기 지역의 2차 병원으로 겨우 옮겼다. 하지만 환자의 상태를 확인한 병원 측은 "대동맥박리(대동맥이 늘어나 혈관 벽이 손상되는 급성질환)로 보인다"면서 "더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간신히 서울 성북구 소재의 병원을 찾아 이송을 마쳤지만 이날 C씨와 동료 대원들은 환자의 자택인 서울 동남권에서 경기 성남시로, 다시 서울 성북구로 4시간을 헤맸다.

'최후의 수단' 환자 직접 방문 권하기도

한국일보

3일 서울 시내의 한 대학병원 응급의료센터 인근에서 소방 대원이 구급차를 정리하고 있다. 정다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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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대원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환자나 보호자에게 직접 응급실을 방문하는 것을 권고하기도 한다. 구급대원 D씨는 지난주 약물중독(DI) 환자를 이송하기 위해 2시간가량 병원 40여 곳에 전화를 돌렸지만 이송 가능한 곳을 찾지 못했다. 그는 "환자가 수면제를 30알 이상 복용한 상태라 위 세척이 시급했는데, 받아주는 병원이 없었다"면서 "보호자가 '차라리 집에 가서 죽겠다'고 하소연하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결국 D씨는 "워크인(직접 방문)은 받아주는 경우가 있다"고 안내했고, 보호자는 환자를 데리고 직접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들이 구급차 이송 환자는 거절하고 내원 환자는 받아주는 이유에 대해 구급대원들은 직접 방문한 환자보다 소방의 인계 요청을 거절하는 게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어서 아니겠느냐고 추정하고 있다. B씨는 "아픈 환자에게 대놓고 다른 병원 가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반대로 구급대원들은 거절을 당해도 계속 환자를 봐주거나 다른 병원을 찾아주리라 생각하는 것 같다"고 한숨을 쉬었다. 병원의 응급의료 능력 평가에 내원 환자를 돌려보내는 수치는 반영되지만 119 구급대의 이송 환자 수용률은 집계되지 않아서란 분석도 나온다. 일선서에 근무 중인 한 소방대원은 "방문 환자를 돌려보내는 것 외에 '119구급대의 환자 인계 지연율'도 평가에 반영해야 한다"고 짚었다.

원인이 어떻든 이 같은 일이 반복되는 건 분명 정상은 아니다. 의료진 부족에 따른 응급실 운영 위기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현상이라는 지적이 높다. A씨는 "국민 생명이 걸려 있는 문제인 만큼 이렇게 방치할 때가 아니다. 근본적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태연 기자 ty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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