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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 (일)

[젠더살롱] '정화'의 욕망, 철거의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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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동두천 옛 성병진료소에 깃든 과거와 현재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와 서한영교 작가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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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동두천시 미군 위안부 성병진료소 전경. 성연창 세명대 영화웹툰애니메이션학과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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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공부하는 모임의 동료들과 경기 동두천시 소요산 앞 옛 성병진료소 및 격리수용소를 찾은 날은 흘러내린 땀방울이 살갗까지 파고드는 무더운 날씨였다. 한낮의 소요산 입구는 붐비는 등산객들 사이로 트로트와 옛 가요가 번갈아 울려 퍼지고 있었고, 바로 옆에는 우중충하게 버려진 성병진료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새 건물의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이 있었다. 나이 든 등산객들과 어린 자녀를 데리고 박물관을 방문한 젊은 부부들이 오가는 사이에서 나는 디자인학자 박해천의 '아수라장의 모더니티'란 표현만큼 이날의 소요산 앞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은 달리 없으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성병진료소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었다. 우리를 인도한 해설사는 동두천시가 이 건물의 폐쇄를 추진하면서 막아놓은 상태라고 알려주었다.

성병진료소 및 격리수용소는 1970년대 미군 기지촌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한 여성들의 성병 관리를 위해 한국 정부가 세운 기관이었다. 1972년 후반부 전국 기지촌에 11개의 성병진료소 및 격리수용소가 세워졌고 그중 6곳이 경기도에 있었다. 이제는 모두 사라지고 우리가 찾은 소요산 앞 건물이 단 하나 남은 것이었다.

닉슨 독트린, '기지촌 정화운동' 그리고 성병진료소


1997년 미국에서, 한국에서는 2002년에 출판된 재미 정치학자 캐서린 H.S. 문의 '동맹속의 섹스'는 기지촌 여성들의 위치와 경험을 통해 한미관계의 진실을 파헤친 역작이다. 1970년대 전국적으로 성병진료소가 세워진 것은 미 사령부와 한국 정부의 협력체인 '한미 합동위원회'가 주도한 '기지촌 정화운동'의 결과였다. 1969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발표한 '닉슨 독트린', 일명 '괌 독트린'이 시발점이다. 당시 베트남 전쟁에서 고전하고 있었던 미국은 이 발표에서 '앞으로 베트남 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은 피할 것'이며 '아시아 각국에 대한 원조를 직접적 군사개입에서 경제원조로 바꾸어 나갈 것'을 천명했다. 한국에서 이는 곧 미군 철수 내지는 축소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한국민들과 한국 정부의 충격은 대단히 컸다. 한국전쟁의 경험과 여파가 대부분의 한국민들에게 선명했던 시절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1949년 미군 철수를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할 만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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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H.S. 문의 '동맹속의 섹스'. 삼인 제공


한편 기지촌이 위치한 지역에서 전개된 상황은 좀 더 복잡했다. 미군이 가진 달러를 벌어들이려는 집요한 노력, 심심찮게 벌어진 미군 병사들에 의한 민간인 및 성매매 여성 대상 폭력 및 살해 사건들, 보다 가시화된 백인 병사와 흑인 병사 간 긴장과 갈등으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순간들이 1970년대 내내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한 선택은 미군들의 기지촌 생활을 개선시켜 달라는 미 사령부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1971년 12월 31일 한국 정부와 대통령 행정 비서, 각 부처 차관, 국세청 국장, 국무총리 행정비서, 경제기획원 차관보, 경기도지사, 대통령 비서 등 고위급 관계자들이 모인 회의에서 '기지촌정화위원회(Base-Community Clean-up Committee)' 설립이 공식화된 것이다.

왜 기지촌 '정화' 운동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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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파주시 캠프 스탠튼 미군기지 인근 기지촌. 파주=이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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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기지촌 '정화(Clean-up)' 운동이었을까. 정화는 불순하거나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영어 클린(clean)도 그러한 뜻을 가지고 있다. 대체 어떤 불순하거나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만들 의도였을까.

1971년부터 1976년까지 전개된 '기지촌 정화운동'이 가장 힘을 쏟은 것은 성병 관리였다. 성병 관리의 방식은 다양할 수 있지만 기지촌 정화운동에서 택한 방식은 성매매 여성들을 등록시키고 그들에 대한 예방과 치료를 병행하는 것이었다. 성병진료소와 격리수용소는 일주일에 두 번 임질검사와 석 달마다 한 번 매독검사를 실시하고 병에 걸린 여성들을 수용했다. 여성들은 자주 쇼크사망사로 이어진 성병 치료와 격리수용소에 있는 기간 동안 벌지 못해 불어나는 빚을 감당해야만 했다. 성병 치료에 드는 비용도 모두 여성들의 부담이었다. 미군들은 성병 교육을 받았을 뿐 직접적인 몸의 관리 통제를 받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라 미군들은 자신들을 성병에 '걸리게 한' 여성들을 지목할 수 있었다. 흑인 병사들과 백인 병사들 간 긴장과 갈등이 지속되는 가운데 병사들은 그들 사이를 오가며 상대하거나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대접'을 한 여성들을 성병 의심자로 지목해 격리수용소로 보내 버리는, 일종의 '보복'을 공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병은 성관계를 통해 걸린다. 이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이다. 그런데도 여성만이 문제라는 식이었다. 여성의 존재 자체가 불순하고 더러운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불순하고 더러운 여성의 표상.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월경을 하는 기간 동안의 여성은 '불결한' 존재로 여겨져 왔다. 월경을 할 때 여성들이 흘리는 피는 콧물, 귀지, 정액, 토사물과 같은 신체 배설물과 함께 원초적 혐오(disgust)의 대상이다. 인류학자들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동물성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이는 여성이 마땅히 혐오의 대상이 되는 논리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시시때때로 정액을 배출하는 남성들은 불순하고 더러운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남성의 정액 배출은 그것을 '받는' 여성 존재의 더러움으로 연결된다. 여러 명의 남성을 상대한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은 강제 진단과 격리를 통해 '정화'되어야 할 이들로 여겨졌다. 그녀들 못지않게 여러 여성과 관계했을 병사들은 반대로 정화가 필요한 대상이 아니라 정화시킬 권력을 갖고 있는 이들이었다.

옛 성병진료소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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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8월 6일 미군 제3보병사단 응급구호소에서 한국인 의사가 성매매 여성을 진료하고 있다. 당시 미군은 성매매를 하는 한국 여성에게 의무적으로 성병 검사를 요구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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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성병진료소 및 격리수용소를 철거하려는 동두천시의 의도가 기지촌 여성들을 정화하려 했던 그때의 욕망과 닮아있다면 어떨까. 여성의 몸을 도구로 삼아 외화를 벌어들였던, 가난했던 한때의 남루한 기억을 이제는 지워버릴 수 있을 만큼 성장했음을 강박적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망. 이야말로 우리 시대 '정화' 욕망의 구체적인 모습이 아닐까.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과거가 지워질까. 뜯어내지 않은 벽지 위에 새 벽지를 발라보았자 잠시 보이지 않았던 곰팡이가 곧 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순간이다. 제대로 직면하지 않은 과거는 반드시 돌아와 우리를 잠식한다. 나는 그것이 인터넷 세상을 뒤덮은, 그리고 현실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여성혐오라고 생각한다. 여성들을 둘러싼 환경과 여성 자신들의 변화는 놀라울 정도다. 그러나 변화를 함께 더 나은 미래를 만들 계기가 아니라 자신의 남성성을 위협한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온라인상에서 '약아빠지고 헤프고 사치스럽고 추한, 그래서 더럽고 불결한 여성'을 만들어내고 여성들에 대한 진단과 격리의 역할을 자임한다.

우리가 하나 남은 옛 성병진단소를 지켜야 한다면 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욕구와 필요로 삶을 살았던 이들이 강제 진단과 격리가 가능한 사물로 격하되어 창문을 부여잡고 나가고 싶다고 부르짖었던 그 장소가 오늘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은, 사람을, 여성을 기꺼이 그런 사물로 만드는 약탈적이고 폭력적인 체제, 그러느라 전쟁을 불사할 뿐 아니라 끊임없이 전쟁을 만들어내는 체제다. 그리고 그 체제는 현실에서, 온라인에서, 세계 곳곳에서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과거를 기억하는 이유와 힘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는 과거를 인식하고, 성찰하고, 다른 시간을 만들어가기 위함일 것이다. 지난 1년 반 동안 쓴 글들이 독자 여러분에게 젠더 시각으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읽을 만한 사례가 되었기를 소망하면서 인사드린다. 독자 여러분,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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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82914080003629)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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