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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4 (토)

[fn광장] 권위주의 구습과 안세영의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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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뉴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구습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래도 간혹 개인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구습이 깨지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한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안세영이 그동안 훈련과 시합을 통해 겪었던 힘든 경험과 고민을 용기 있게 토로하였다. 이 행동은 좁게는 배드민턴협회와 체육계, 넓게는 정치권, 언론, 나아가 사회 전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반향은 상명하복 권위주의 구습을 배격하는 쪽으로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구습에 젖어있는 일부 사람들은 그의 발언을 불편하게 여기거나 묵살하고 싶어 한다.

안세영은 기자회견이나 SNS에서 비난이나 대결의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어린 선수 개인의 입장으로 얼마나 힘들었고, 어떤 점이 아쉬웠고, 향후 어떤 변화가 있으면 좋을지를 담담하게 말했다. 다원주의 문화가 퍼지고 민주주의 가치가 중시되는 사회에서라면 그런 발언은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다. 꼭 그런 사회가 아니어도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발언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대학에서 학기가 끝나면 학생은 수강과목마다 수업 내용과 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고, 어떻게 개선되면 좋을지 평가서를 작성한다. 공공기관, 기업, 시민단체, 교육기관 등도 대부분이 업무·활동 관련 불편·개선 사항에 대한 의견 개진을 제도화하고 있다. 군대에도 소원수리 제도가 있다. 그런 맥락으로 보면 안세영의 발언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상 대화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대한배드민턴협회와 대한체육회의 간부진이 보인 반응은 정상적 일상과는 차이가 컸다. 왜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느냐는 당혹감, 협회의 도움을 몰라주고 오해로 불평을 터트린다는 불쾌감, 왜 이 선수만 불만에 차 반항하느냐는 의구심, 선수가 건방지게 지도·관리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는 고까움 등이 이들의 대응태도에 여실히 드러났다. 게다가 일부 언론매체마저 충격발언, 폭탄발언, 폭로, 도전 등 자극적 표현으로 안세영의 의도를 왜곡했고 이번 사안을 적대적 대결구도 속으로 집어넣었다. 이러한 체육계와 언론의 반응 이면에는 선수가 임원에게 문제를 제기해선 안 되고 집단행동에서 이탈하거나 튀어선 안 된다는 권위주의, 집단주의, 순응주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안세영의 일상적 발언이 일파만파 커지고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건 이런 시대착오적 구습에 젖은 이들의 경직된 반응 때문이다. 만약 체육계 어른들이 유연한 모습을 보이며 어린 선수의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개선을 위한 진솔한 대화를 했다면 어땠을까. 만약 언론이 선동적 기사로 야단법석을 떠는 대신 금메달리스트의 고충을 진지하게 보도하고 심층분석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안세영의 발언은 대중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논란이나 소동이 아니라 체육계의 발전을 위한 고심에 찬 문제의식으로 비(非)대립적 차원에서 다뤄졌을 것이다.

유독 체육계에서 권위주의 구습이 강하게 남아있는 건 독점체제 때문이다. 선수 선발부터 지도·관리까지 협회가 독점한다. 협회의 미움을 사면 엘리트 선수로서의 생명은 끝난다. 선수에게 다른 길이 없으므로 협회의 어른들은 어린 선수들 위에 군림하며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는 태도를 견지한다. 권위주의, 집단주의, 순응주의가 지배하는 환경이다.

독점구조에서의 경직된 상하관계는 체육계뿐 아니라 주요 정당들에도 해당한다. 공천권과 징계권을 독점해 소속 정치인들의 생명줄을 쥔 당 최고지도부가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당 내부의 순응적 집단주의를 굳히고 있다. 이런 정당들이 정치를 파탄 내고 정치인들의 개인적 양심을 희생시키고 있듯이 독점적 체육단체가 체육 발전을 막고 선수들의 꿈을 부수고 있다. 구습으로 멍든 현실을 바꾸려면 독점구조를 깨거나 적어도 문제 제기를 일상화해야 한다는 정당 관련 교훈은 체육계에도 딱 맞는다. 안세영의 용기 덕에 이런 인식이 퍼지고 있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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