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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4 (토)

문제는 의사가 ‘없는’ 게 아니라 ‘일할 수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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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필수의료 분야는 애초에 병원에서도 돈이 안 되는 분야라고 손사래를 치는 분야인데 무엇 하러 자기 삶을 갈아 넣으러 들어오는가.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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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의료를 살리겠다면서 점점 더 필수의료를 죽음의 늪으로 몰아넣고 있는 현 정부의 거듭된 악수를 보면서, 아마 그것은 필수의료를 하겠다고 남아 있는 소수의 의사들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매번 한다.



한겨레

필수의료와 기초의학의 상황은 다르고, 내가 하는 것은 심지어 기초의학이라고도 분류되지 않는 의료인문학이기 때문에 맥락이 더 다를 수 있지만, 비슷한 구석이 있으리라고 믿기에 오늘은 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은 투정을 부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질까 봐 두렵지만, 이런 일을 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릴 필요는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오히려, 필수의료하시는 분들의 마음은 조금이라도 더 잘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나는 말하고 글 쓰는 사람이니 말이다.





의료윤리와 의료인문학을 하게 되기까지





나는 의학 계열을 공부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대입 시점에서 몇 가지 우연으로 치과대학을 선택했고, 들어온 다음에는 학교에 대한 별다른 생각이 없어 그냥 다녔다. 적당한 성적을 받았고, 시험이나 실습에서 여러 스트레스를 받았을지언정 그냥 거기까지였다. 치의학이 내 평생의 업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학생 실습에서 환자를 보면서, 졸업하고 전공의가 되어 당시 이미 희소한 전공이 되어 가던 소아치과를 선택하면서, 조금씩 내가 의사로서 감당해야 할 의무들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냥 생각만 한다고 뾰족한 답이 나올 리 없었다. 무엇보다 충격이었던 것은 ‘의사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해 줄 수 있는 선배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각자 멋지게, 잘살고 있는 이들은 있었다. 그러나 정리된 언어로 의사란 무엇이고, 의업(醫業)을 감당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말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군의관이 되고 나선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면 몇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과학학을 전공해서 사회학적 관점에서 의학을 바라보는 방법도 있었고, 의사학(의학의 역사를 공부하는 학문이다)을 전공해서 역사학적 관점에서 의학을 바라보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마찬가지로 우연히도 의철학을, 의학에 관한 철학적 검토를 공부하는 것을 선택했다. 의료인문학 박사라는 명칭이 그 위에 붙어 있었다.



의학에 관한 철학적 검토라고 해서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저 의학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는 무엇이며, 그 안에서 중심 주체인 환자와 의료인은 누구인지 생각해 보는 것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실이 어떻고 어떤 사람들이 있는 것 대신, 우리가 개념적으로 ‘의료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아니면 의학적 지식을 어떻게 얻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나는 상황 때문에, 그리고 함께 공부하던 사람들 때문에, 역사와 정치가 지식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는 방향으로 접근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좋은 의료와 옳은 의료가 무엇인지 점검하는 것도 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을 다루는 의료윤리와 관련하여 정말 겸사겸사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오게 되었다.



공부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주변의 한심하게 바라보는, 또는 불안하게 여기는 눈초리, 예컨대 “저기까지 했으면 이제 치과 원장으로 돈 벌어야 할 텐데, 저 친구는 뭐 하는 건가?”라는 직간접적인 힐난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어쩌다 의업에 떠밀려 온 자로서 드디어 내가 처음에 고민했던 것, “여기에서 의사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나름의 정련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문제는 공부 다음이었다.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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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을 진료하면서 좋은 의사, 좋은 의료가 무엇인지 고민하던 것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지금은 그냥 하루하루를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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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먹고 살 방도가 없다





내가 공부를 선택했다고 자리가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경우엔 ‘아예’ 자리가 없었다. 없었다고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은 사태를 축소하는 일인데, 지금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교수로 일을 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학교에서 나에게 부여한 자리는 내 전공에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나는 아직 임시직 상태다. 대학의 전임교수 중에 유일하게 ‘비정년 전임교수’라는 특이한 이름을 달고 산다.



내 분야가 그다지 필요 없는 것이라서 그럴까. 이건 다분히 내 관점이라는 것을 전제해야겠지만, 지금 사회에서 의료를 놓고 벌어지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거의 유일하게 ‘해답’을 말하고 있는 유일한 분야가 내가 참여하고 있는 의료윤리와 의료인문학이다.



의료윤리는 애초부터 의과학 및 의료 제도와 환자, 사회가 의료에 원하는 것 사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1970년대에 탄생한 분야였다. 다시 말하면 의료윤리는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의정 갈등과 같은 문제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분야였다는 말이다. 참, 지난번에도 썼지만, 아무도 이것을 윤리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나설 구석이 없을 뿐이지, 지금의 문제는 의료윤리의 문제요, 의료계와 정부 사이에서 다른 가치와 관점을 내세울 때 타당함, 정당함, 합당함을 기치로 우리가 같이 어디로 가야 할지 원체 논의하고 논의할 수 있어야 하는 분야다.



의료인문학은 워낙 큰 우산이라, 안에 여러 분야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와 있는 학문은 환자와 시민이 의료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그 접면에서 어떤 경험을 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을 그 목표 중 하나로 삼는다. 의료인류학이 대표적이고, 내가 이 칼럼의 제목으로 삼고 있는 서사의학도 그중 하나다. 이런 문제가 주로 환자와 의료인 사이의 의사소통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므로, 의료커뮤니케이션학도 이런 문제를 다룬다. 쉽게 말해, 병원에서 환자들이 겪는 불편이나, 사회가 의료에 대해 느끼는 불안, 개인이나 집단이 의료적 문제로 겪는 차별 경험과 같은 것을 연구하고 드러내어 제언하는 분야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사회가 의료를 놓고 겪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해결책을 내놓으려면 이런 분야가 필요다. 그러나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신생 학문이라서 공부한 사람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단 대학이나 연구소에 자리가 없다. 자리가 있어도 이런 연구 대신 다른 일을 해야 한다.



나만 해도 아침 8시에 출근해서 밤 8시에 퇴근할 때까지 거의 학교의 교육과 학생 사무를 하는 데 시간을 다 보낸다. 이전에 점심 먹을 시간은 포기했고, 요새는 화장실 갈 시간도 없어서 방광염 초기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건 기본 일정이고, 당연히 초과로 일할 때가 더러 있다. 하지만 누구도 나에게 초과 근무 수당 같은 것은 배정해 주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나를 치과의사라고 생각하지만, 아픈 이가 있는데 치과에 갈 시간이 없어서 그냥 버티고 산다. 원체 해야 했을 의료윤리와 의료인문학? 별도로 개인 시간을 내서 연구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도 학교에선 아무런 인정을 못 받는다. 개인 취미를 하는 일 정도로 이해받는 것이 내 삶이다.



그런데도 한다. 환자에게, 사회에 조금이라도 나은 의료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있었다. 내가 십 년을 진료하면서 좋은 의사, 좋은 의료가 무엇인지 고민하던 것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냥 하루하루를 버틴다.



한겨레

애초에 할 수 있는 일로 만들었으면 필수의료니 기초의학이니 하는 사람이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런 가치도, 보장도 두지 않아서 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이상한 대안을 내놓으면 어쩌란 말인가.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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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의료를 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





각자에게 상황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기초의학이나 필수의학을 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어려움이 크게 다르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나를 그 안에 포함하는 것을 용서하시라) 나름의 사명감으로 지금까지 이 일들을 감당해 왔다. 그러나 일단 사회가 기초의학이, 필수의학이, 아니면 우리의 의료윤리나 의료인문학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말로는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재정도, 자리도 마련해 주지 않는다. 학교가 해주면 된다고? 학교는 생각보다 재정적 여건이 팍팍하고, 한국에서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학교는 없다.



내 주변에 큰 뜻을 품고 필수나 기초를 하려던 여러 선생들이 있었다. 나도 이러고 살고 있으니,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이 한둘이었겠는가. 오죽하면 “딴짓하는 의사들은 대충 다 알아”라고 말하고 다녔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가족의 지원이나 이해가 없어서, 그도 아니면 학교가 받아주지 않아서, 또는 자리가 있어도 얼토당토않은 조건을 강요당해서 이 길을 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전체 의사 풀을 늘리면 필수의학이나, 또는 기초의학을 하는 사람이 생길 것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 중요한 분야라고 제도로 보장하지 않으면 이 분야가 커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병원에서도 돈이 안 되는 분야라고 손사래를 치며 매번 과장회의에서 압박을 받는 분야인데 무엇 하러 자기 삶을 갈아 넣으러 들어오는가. 게다가 필수의료는 생명과 관련된 분야라 소송에 걸릴 가능성이 더 크고, 결국 소송과 보상비용까지 생각하면 한국에선 하면 안 되는 분야다. 의사 수가 늘어나도 다른 여러 분야가 많고, 늘어난 의사들은 그 일만 해도 충분하다. 정말 ‘의사 증원’으로 ‘필수의료’를 늘리려면 만 명이 아니라 한 5만 명쯤 늘려야 할 것이다. 글쎄 감당은 할 수 있을까?



이런 말을 하면 정부는 수가를, 지원을 올렸다고 말한다. 늘리긴 했다. 최근 정부가 몇 가지 개선책을 발표하긴 했다. 예컨대 8월13일에 내놓은 1000여개 중증수술 수가 인상안이나 8월22일에 발표한 응급실 경증환자 외래진료 부담금 인상안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게 대책인가? 중증수술을 일 년에 몇 번이나 할까. 저 수술들 수가 올린다고 갑자기 필수의료 분야가 다른 분야만큼이라도 수익을 낼까? 그럴 리가 없다. 말 그대로 생색내기이지, 현장에선 큰 차이가 없다. 응급실 외래진료 부담금? 올리려면 당신들이 나중에 받아 가라.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질병과 의료에 대한 고민은 전문가에게 맡겨 놓으라는 식이었기 때문에, 환자들과 가족들은 아직 질병 구분할 능력이 없다. 아프면 일단 병원부터 뛰어 가는 사회로 국가가 만들어 왔다. 그런데 돈은 이제 응급실에서 더 올려 받으라? 환자와 병원 사이 갈등만 조장한다.



이렇게는 안 된다. 당신들의 개선안은 개악이요, 불에 섶을 지고 뛰어드는 일일 뿐이다. 애초에 할 수 있는 일로 만들었으면 필수의료니 기초의학이니 하는 사람이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들이 아무런 가치도, 보장도 두지 않아서 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 병원에서 한직으로 밀려날 만한 상황을 만들어 놓은 다음, 그 다음에 이상한 대안을 내놓으면 어쩌란 말인가. 제발 좀,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가.



김준혁 | 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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