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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4 (토)

전기차·배터리 업계가 '붉은 깃발법'을 떠올리는 이유[기자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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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자동차 산업 발목 잡은 '붉은 깃발법'
지자체, 충전율 제한 등 설익은 규제 움직임
한국은 글로벌 전기차·배터리 선도국
한국일보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총리공관에서 열린 제20차 고위당정협의회에서 전기차 화재 안전관리 대책 등이 논의됐다. 이날 당정은 전기차 배터리 제조사 정보공개 의무화와 배터리 인증제 시범 사업 조기 시행, 전국 모든 소방서 전기차 화재 진압 장비 전진 배치, 안전성 무상점검 정기화, 과충전 제어 스마트 충전기 확대·보급 등이 담긴 대책을 확정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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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를 향한 공포감을 만들고 있다는 게 큰 문제입니다.
전기차 분야 한 전문가


1일 발생한 인천시 청라지구 전기차 화재 후 전기차와 배터리 화재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막연한 불안감을 반영한 언론 기사가 쏟아지던 시점. 한 전기차·배터리 분야 전문가는 전기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커지는 것을 걱정했다. 화재에 대한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는데 일부 국민들은 전기차와 배터리를 화재 위험을 안고 달리는 시한폭탄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

여기에 서울시, 충남도 등 일부 지방자치단체들이 당장 충전율 90%가 넘으면 전기차의 출입을 못 하게 하려 하자 불안감은 더 커졌다. 앞서 서울시는 9월 말까지 '공동주택 관리규약 준칙'을 바꿔 공동주택 지하 주차장에 충전율이 90% 이하인 전기차만 출입할 수 있게 권고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정치권도 앞다퉈 설익은 입법안을 쏟아내고 있다.

이미 일부 관공서와 병원, 아파트 등에서는 전기차의 지하 주차장 출입을 막거나 충전기 전기 공급을 끊어버리고 있다. 하지만 산업계와 전문가들은 과충전 때문에 불이 난 건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다. 특히 배터리관리시스템(BMS) 등을 통해 기술적으로 충분히 불을 예방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결국 화재 원인과 대책을 과학적 근거 없이 전기차→배터리→충전기로 옮기자 국민들 마음속에서 불신과 갈등만 커지고 있다.

여론 등 떠밀려 만든 규제가 산업 발전 저해

한국일보

그래픽=송정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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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악화하자 전기차·배터리 업계에서는 영국의 '붉은 깃발법'이 회자되고 있다. '적기(赤旗) 조례'로도 불리는 이 법은 1865년 영국 정부가 증기기관 자동차의 등장에 대한 비판 여론에 부랴부랴 만든 법으로 시대착오적이며 반(反)시장적 규제 사례로 자주 거론된다. 이 법에 따르면 자동차가 도로를 달릴 때는 사람과 말 등이 놀라지 않도록 붉은 깃발을 든 사람이 자동차 60야드(55m) 앞에서 먼저 달리도록 규정했다. 또 도심 내 자동차 최고 속도는 성인 남성의 걸음보다도 느린 시속 2마일(3.2㎞)로 제한했다. 결국 산업혁명 이후 전 세계 자동차 산업을 이끌었던 영국은 산업이 발전하지 못했고 그 주도권을 독일과 미국에 넘겨줘야 했다.

한국은 글로벌 전기차 산업을 이끌고 있다. 현대차·기아는 올해 상반기(1~7월)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 8위에 올랐고 미국에서만 두 번째로 많은 전기차를 판매하는 기업이 됐다. 한국의 대표적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는 모두 글로벌 배터리 시장 톱(TOP)5에 이름을 올렸다.

전문가들은 자동차의 전동화는 정해진 미래라고 입을 모은다. 전기차에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도 결국 전기차가 MP3, 스마트폰처럼 대중화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성장통을 겪고 있는 전기차 산업이 엉뚱한 규제 때문에 발목 잡히는 일이 없길 바란다.

강희경 기자 kst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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