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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금)

[김화진칼럼] 싱가포르 현대차의 초록색 미래 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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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김화진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원 교수


싱가포르는 국토가 남북보다 동서로 약간 더 길다. 동쪽 끝에 있는 창이공항에서 서쪽으로 약 30분 달리면 나라 끝에 주롱 혁신지구가 나오고 거기에 현대자동차 글로벌 혁신센터(HMGICS)가 서있다. 지하 2층, 지상 7층 규모의 스마트 팩토리다. 2023년 말 준공되었다. 약 300명이 일한다.

맷 데이먼과 크리스천 베일이 나오는 '포드 v 페라리'(2019)에 옛 페라리 공장이 잠깐 나온다. 열 대가 채 못되어 보이는 페라리를 한 공간에 펼쳐놓고 각각 열심히 제작하고 있는 장면이다. 고가의 스포츠카는 당시에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량 생산해야 하는 일반 자동차는 1913년에 헨리 포드가 도입한 컨베이어 시스템에서 이루어진다. 19세기 말에 철광석, 석탄 같은 원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발명된 컨베이어가 자동차 생산에도 응용된 것이다. 컨베이어 시스템 덕분에 예컨대 기아차 슬로바키아에서는 55초마다 한 대가 생산된다.

컨베이어는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장치다. 수요를 예측해서 미리 대량 생산해 두고 실제 주문에 따라 바로바로 출고한다. 반대로 HMGICS는 옛 페라리 공장처럼 셀시스템에서 여러 종류의 차를 소량 생산하는 곳이다. 27개 셀, 5개 공정으로 무수한 수요자들의 다양한 취향과 요청을 다 충족한다. 컨베이어가 할 수 없는 작업이다. 약 200대의 자율이동로봇(AMR)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AI는 필수다. 극강의 데이터 축적과 전달, 그리고 분석 능력이 필요하다.

HMGICS는 현재 아이오닉5와 자율주행 로보택시 연 3만 대의 생산능력이다. 많지 않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서 개발되고 검증된 기술이 현대차그룹의 다른 생산시설로 이전되어서 적용될 것이라는 점이다. 첨단기술 연구소 기능을 함께 수행한다. 알고리즘이 최적화되면 생산하는 차종이 많아질 수 있다. 곧 가동될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와 울산 EV 전용 공장에도 적용된다. 또 있다. 여기서 개발된 미래 모빌리티 솔루션은 미래항공모빌리티(UAM)에도 활용된다.

현대차 홈페이지는 혁신센터가 다른 곳이 아닌 싱가포르에 자리 잡은 이유를 싱가포르와 현대차가 "진보의 DNA를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싱가포르는 혁신의 아이콘이고 세계 최고의 대학들이 고급 인재를 양성해서 배출하고 있다. A*STAR로 대변되는 혁신과 규제개혁의 상징, 해상 물류허브이고, 무엇보다 싱가포르에는 돈이 있다. 글로벌 금융허브다. 또, 싱가포르는 제조업 기반이 취약한 현대적 소비도시다.

싱가포르는 도시국가여서 통상 먼 교외인 도시권역에 자리 잡는 대규모 생산시설은 곤란하다. 도심 가까운 곳에서 생산해 고속도로를 통한 장거리 수송 과정을 생략하고 탄소 배출도 줄인다. 싱가포르 거주 고객이 현대차 공장을 방문해 차량을 주문하고 완성 차량을 인도받는데 이론적으로 6시간이면 된다. 자동차의 친환경 로켓배송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건물 지붕에는 태양광 발전 패널 외에 고객들이 신차를 인도 받기 전에 테스트 드라이브를 하는 620m 길이 스카이트랙이 있다. 속도 제한이 70km/h지만 건물 옥상에서의 자동차 주행 경험은 각별하다.

HMGICS 1층으로 걸어 들어가면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기계나 전자장치가 아닌 스마트팜이다. 자동차라는 고전적인 기계(전자)장치 생산시설에서 초록색으로 빛나는 농장을 가장 먼저 만나게 된다. 로봇 팔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채소를 재배하는데 흙이 없다. 식물이 평면이 아니라 수직으로 배치되어 있는 미래형 농장을 보여준다. 농지 비율이 1%에 불과한 싱가포르다. 식량문제의 새로운 솔루션이다.

자동차를 만드는 빌딩 1층에 왜 초록빛 농장이 있을까. 산업혁명의 대표 산출물인 자동차와 먼 옛날 농업혁명을 비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렵과 채집으로 생존하던 인간이 농업혁명으로 미래를 바꾸었던 것처럼 제조업의 근본적 변혁을 제시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전통 제조업을 사람(소비자) 중심, 정보기술(IT)과 운영기술(OT) 결합을 통해 친환경 미래 제조업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1층의 스마트팜은 미래 공장의 농업판이다. 빌딩에서 생산된 채소는 근무자와 방문객이 먹는다. 현대차그룹 창업자 정주영 명예회장이 평생 본인의 농사꾼 정체성을 소중하게 여겼다는 점도 떠오른다.

내가 만드는 고가의 물건을 앞으로 누가 얼마나 많이 사려고 할 것인지를 예측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한두 종류도 아니고 수십, 수백 종을, 수없이 많은 구매자의 개인적 취향과 사용 목적에 맞추는 것은 더 어렵다. 자동차는 소유자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특이한 공산품이다. 명품백 못지 않은 개성을 표현하고 차종에 따라 차주들간 연대감이 있는가 하면 이제는 스마트폰 뺨치는 첨단 기능과 이미지도 요구받는다. 성능과 안전성은 기본이고 친환경까지. 그런 물건을 맞춤형으로 신속, 대량 생산한다? 이런 불가능에 현대차가 도전하고 있다. 현대차가 한 세기 전 포드가 성취했던 혁신을 능가하기 바란다.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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