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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금)

[기억할 오늘] "종들의 종인 내게 교황관은 너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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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6 교황 요한 바오로 1세
한국일보

착좌 33일 만에 선종했지만 2000년 교회 역사상 가장 존경할 만한 교황 중 한 명으로 기억되는 요한 바오로 1세 교황.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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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의 진보 개혁주의적 노선에 동조하는 이들은, 착좌 33일 만에 돌연 선종하고도 2000년 가톨릭 교회 역사상 가장 존경할 만한 교황 중 한 명으로 기억되는 요한 바오로 1세 교황(1912~1978)의 그림자를 본다.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주 가난한 벽돌공의 장남(Alvino Lucciani)으로 태어난 그는 35년 사제 서품을 받고 목회 활동과 신학대 교수, 주교(58), 추기경(73)을 거쳐 1978년 8월 26일 콘클라베 네 번째 투표에서 교황으로 선출됐다. 주교 승품 당시 자신의 사목 표어로 ‘겸손(Humilitas)’을 택했던 그는 교회 혁신의 전환점이 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요한 23세(1958~63 재위)와 공의회를 재개해 쇄신을 마무리한 바오로 6세(1963~78 재위)의 뜻을 받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며 ‘요한 바오로’란 이름을 선택했다.

대관식 직전 그는 공식문서를 통해 자신을 ‘짐(朕, Royal We)’이라 칭하던 역대 교황의 관례를 깨고 ‘나(I)’라고 지칭했고, 통상 6시간에 걸쳐 화려하게 진행되던 대관식을 거부하고 간소한 즉위미사로 대신했다. 교황관이라 불리는 ‘삼층관(Papal Tiara)’도 자칭 ‘종들의 종’인 자신이 쓰기엔 너무 무겁다며 마다했다.

신자만이 아니라 선의의 모든 인류를 향한 교회사상 첫 회칙인 1963년의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를 통해 전쟁 종식과 빈부격차 해소, 노동 인권 등을 강조했던 요한 23세처럼 그의 관심도 교회 현안을 넘어 세계의 자유와 정의, 평화로 드넓었다.

그는 특유의 선량한 미소 덕에 ‘일 파파 델 소리소(Il Papa del Sorriso, 미소 짓는 교황)’ 혹은 ‘일 소리소 디 디오(Il Sorriso di Dio, 신의 미소)'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큰 기대를 받고 사랑을 누렸지만, 재위 33일 만인 9월 28일 밤 심근경색에 의한 심장마비로 침상에서 별세했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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