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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금)

美연준의 인플레 전쟁 최대 전리품···“경제 침체 없이 기대 인플레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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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와 전쟁 종식 선언한 美 파월 의장
폴볼커 이래 가장 극악한 ‘인플레 파이터’
1980년 연준 대응보다 피해 최소화 성과
‘기대 인플레’ 초기진압의 중요성도 확인
시장관심은 연준성과보다 금리인하 폭에


매일경제

제롬 파월 미국 연준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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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인플레이션의 중요성에 대해 한마디 하겠다. 현대 경제 모델은 기대 인플레이션이 연준의 목표치에 잘 고정되어 있을 경우 상품과 고용 시장이 균형을 이루면서 경기 침체(slack)를 유발하지 않고 인플레이션 목표치로 돌아올 수 있다는 관점을 오랫동안 견지해왔다. 모델들은 그렇게 말했지만, 200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발생한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기대 인플레이션이 잘 고정돼 있다는 확신은 거리가 멀어졌다.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을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고정되지 않은 기대 인플레이션이 경제의 둔화, 특히 노동시장 둔화로 파급될 수 있다는 염려가 있었다. 최근의 경험에서 중요한 시사점은 중앙은행의 적극적인 조치로 기대 인플레이션을 묶어두면 경기 둔화 없이도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23일 와이오밍주 잭슨홀 미팅에서 통화정책 전환을 시사하며 사실상 인플레이션과 종전 선언을 한 제롬 파월 미국 연준 의장.

16분이 넘는 연설을 관통하는 그의 중요 메시지는 이처럼 연준이 2022년부터 긴축적 통화 정책으로 전환한 후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에서 높은 실업률과 기업 파산 등 ‘경제 침체’라는 고비용을 치르지 않고 2% 목표치에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1980년대 폴 볼커 연준 의장(1927~2019년)이 ‘대(Great) 인플레이션’을 잡는 과정에서 치른 막대한 경제적 비용과 대조되는 결과로, 제롬 파월 의장은 이를 ‘역사적으로 이례적인’ 결과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절제와 중립의 언어로 썼지만 ‘연준이 이렇게나 놀라운 역사적 성과를 거뒀다’고 읽어달라는 호소가 느껴집니다.

기대 인플레이션은 중앙은행들이 앞으로 물가를 어느 정도로 예상하는지를 파악하고자 설문조사 방식으로 측정하는 지표입니다. 예컨대 향후 물가가 상승할 것이라는 심리가 강하면 소득 감소를 염려한 근로자들의 임금 인상 압박이 시작되고 이는 기업의 상품 가격 인상이라는 악순환을 유발합니다.

2022년 인플레 파이터로 변신한 제롬 파월 의장이 기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보인 행보는 1980년 전후 폴 볼커 전 연준 의장의 행보를 연상케 했습니다.

볼커 전 의장은 당시 고물가와 고임금이 소용돌이치며 만든 살인적 인플레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21%까지 올린 인물입니다.

40여년이 흘러 파월 의장의 연준은 2022년 6∼11월 사이 무려 4차례의 ‘자이언트 스텝’(0.75%포인트) 인상을 연속 단행했습니다.

화들짝 놀란 시장에서는 당장 파월 의장이 시대착오적인 폴 볼커 흉내를 낸다는 불만이 터져나왔습니다. 1980년대 초의 ‘대 인플레이션’ 상황과 2022년의 ‘팬데믹발 인플레이션’ 상황은 다르다는 것이었죠.

매일경제

美 인플레이션 추이(1980~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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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 전과 달리 달러화는 여전히 강세이고 미 연준의 초긴축 통화 정책이 자칫 신흥국 경제까지 변동성 리스크에 노출시킨다는 경고가 나왔습니다.

또 40여년 전에는 공급망의 주요 기업이 미국 본토에 있었지만 지금은 해외 곳곳에 퍼져 있습니다. 글로벌 공급망 병목으로 인한 인플레 상승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연준의 구식 통화정책 매뉴얼에 반영됐을리 만무하다는 의구심도 컸습니다.

무엇보다 급격한 긴축 통화정책 전환이 미국 경제에 침체를 유발할 것이라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시장 위축을 걱정하는 이들은 “제롬 파월이 폴 볼커라는 유령에 씌였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제롬 파월호의 연준이 무리하게 초긴축 행보를 보인 이유를 설명하는 키워드가 떠오릅니다. 바로 기대 인플레이션 관리입니다.

경제학자들은 시장이 향후 물가가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처럼 행동한다고 파악합니다.

물가가 오를 것이라는 시장 전망이 공격적인 소비 활동으로 이어져 인플레 과열을 유발한다는 것이죠.

문제는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난동을 시작하면 좀처럼 잡기가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볼커 전 의장은 지난 2004년 ‘대 인플레이션 시대가 중앙은행에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인플레이션이 깊이 뿌리 내리도록 해선 안 된다. 한번 뿌리를 내리면 그것을 차단하는 데 극심한 고통이 수반된다. 이것이 세계 모든 중앙은행에 던지는 교훈이다.”

매일경제

고(故) 폴 볼커 전 연준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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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 기간 중 자신의 살인적 긴축 정책으로 인해 실물경제 참여자들이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치렀는지 잘 알았던 그였기에 이 같은 답변을 한 것이죠.

제롬 파월의 연준이 1980년 전후의 대 인플레이션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2022년 초긴축 통화 정책을 시도한 것 역시 인플레 기대심리를 초기에 제압하는 게 중요하다는 볼커호 연준에서 얻은 교훈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가 23일 잭슨홀 미팅에서 2년 넘게 벌인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사실상 종식하는 선언을 했지만 시장의 관심은 전쟁 과정에서 파월이 주장하는 역사적 전리품(경제 침체를 수반하지 않은 인플레 관리 성공)보다 앞으로 금리를 얼마나 빠르고 크게 낮출지에 쏠려 있습니다.

사실 폴 볼커처럼 제롬 파월 의장도 역대급 긴축 통화 정책으로 인해 대중의 인기가 높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관련해서 워싱턴포스트 경제 전문 칼럼니스트 로버트 새뮤얼슨은 2019년 12월 볼커 전 의장이 별세하자 ‘우리는 폴 볼커에게 빚을 졌다’는 글을 띄웠습니다.

“볼커는 연준의 인기 없는 긴축 정책을 지지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큰 빚이 있다. 레이건은 볼커를 변함없이 지지했다. 이 둘을 묶은 것은 미국이 불규칙한 인플레이션으로는 번영할 수 없다는 깊은 믿음이었다. 이들의 공동 프로젝트가 성공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부가 거둔 가장 위대한 승리 중 하나였다.”

그를 연준 의장으로 지명했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추모사를 발표했죠. 그는 폴 볼커의 인기 없는 긴축 통화정책으로 말미암아 재선에 실패하고 공화당 레이건 후보에게 권력을 넘겨야 했던 피해자입니다.

“폴은 큰 키만큼이나 고집스러웠고, 연준 의장으로서 그가 취한 정책 중 일부는 정치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politically costly) 옳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국가에 대한 그의 헌신에 사의를 표한다.”

40여년 전 폴 볼커 이후 역대 가장 강력한 ‘인플레 파이터’로 뛰었던 제롬 파월 의장이 퇴임 후 어떤 시대적 평가를 받게될지 자못 궁금합니다.

그가 오는 9월 FOMC에서 급격한 통화정책 전환을 시도할지 여부도 관심입니다.

시장을 공포로 몰고 갔던 충격의 자이언트 스텝 금리인상이 시작되기 한달 전인 2022년 5월, 파월 의장은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힌트를 줬습니다.

“나는 폴 볼커에 대해 아주 약간 알고 있고, 그를 대단히 존경한다. 그 이유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동하는 그의 용기(courage to do what he thought was the right thing) 때문이다.”

폴 볼커식의 급격한 금리 인상이 실물경제에 수반하는 고통의 문제를 지적한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진짜 큰 고통은 인플레에 대처하는 과정에서가 아닌, 인플레가 고착화하도록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수반되는 것이다.”

이번 잭슨홀 미팅에서 연준의 성과를 젊잖게 노출하며 인플레와의 전쟁 종식 선언을 했지만 당장 그가 전쟁 갑옷을 모두 벗어던지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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