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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운동은 일본의 역사 부정 속에서 피해자의 증언에 의존하여 진행되어온 사회운동이다. 피해자의 말하기와 듣기의 전 과정은 투명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그간 피해자의 말을 각자가 필요한 방식으로 전유했다.
이 글의 제목은 평소 나의 생각이자 최근 출간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휴머니스트, 2024)의 편저자 김은실은 ‘위안부’에 대한 새로운 논의 방식을 제안한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확인하는 도구적인 말하기와 듣기가 아니라 새로운 앎의 형식을 만날 수 있는 개방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때 듣기는 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다른 질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또 다른 질문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된다.
1991년 고 김학순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 이후 33년이 지났다. 그간 많은 성과가 있었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는 이 문제의 정확한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여성의 성으로 남성을 위안(慰安)한다는 말은 지극히 남성 중심적 표현이고, ‘위안소’ 제도는 전시든 평시든 용인될 수 없는 폭력이다.
‘위안부’는 전시 성노예(sexual slavery) 제도의 피해자지만, ‘성노예’라는 단어를 차마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 사회는 가해자의 언어인 ‘위안부(comfort women)’를 임시방편으로 사용해왔다. 그래서 언제나 위안부에는 작음 따옴표가 붙는다. 문제 해결은커녕 명명부터 제대로 시작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언제쯤이나 ‘위안부’라는 말을 버리고 이 문제에 대한 본래의 ‘정명(正名)’을 사용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여성계’의 이슈가 아니다. 한국 사회 전체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이 있다.
35도가 넘는 폭염 속 ‘위안부 기림의날’ 맞아 거리 나온 300여명의 시민들
한국 사회가 ‘위안부’ 용어를 계속 사용해 온 배경에는,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를 둘러싼 여성주의적, 탈식민주의적 논쟁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즉 젠더 폭력에 대한 남성 중심적(민족주의적) 해석이 지배적이어서 다른 목소리가 드러나기 어려웠다. 이 문제를 보편적인 전시 성폭력과 인권 의제가 아니라, 식민지배하의 억압으로만 국한할 때 ‘위안부’ 논쟁은 빈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인 방식이 일본 측의 끊임없는 역사 부정(망언들)과 이에 대응하는 데 힘을 쏟는 피해자 민족주의의 적대적 공존이다. 이 때문에 ‘위안부’ 운동은 반(反)성폭력 운동이라기보다는 반일 운동에 경도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과 일본의 진보 진영은 이 적대적 공생관계에 휘말려 제대로 된 논의를 하지 못하고, 일본 우익의 주장을 방어하는 데 급급했다.
망언·민족주의의 적대적 공존 넘어
제12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인 14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이 경찰 펜스에 둘러싸여 있다. 위안부 기림일은 고 김학순(1997년 사망) 할머니가 자신이 겪은 피해 사실을 증언해 위안부 피해자의 존재를 처음으로 공개적인 알린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김창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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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은 왜 ‘위안부’ 운동을 하는가와 맞닿아 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위안부’ 운동은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의 여성에 대한 폭력을 방지하기 위함이지, 과거 자체에 매달려 ‘극일’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진정한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해서, 보다 성숙한 한국 사회를 위해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서 우리에게는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간 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큰 안타까움을 낳은 세 가지 사건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1993년 8월4일 일본의 관방장관(한국의 국무총리에 해당) 고노 요헤이(河野洋平)의 일명 고노 담화이다. 고노 담화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이 가해국임을 인정한 정부 차원의 첫 공식 발표문이었다. 고노 담화는 당시 일본 시민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후 일본 정치권의 보수화와 우익 세력의 반발로 일본 내부에서 힘을 잃어갔다.
당시 한국 사회의 대응도 고노 담화의 의미를 살리고 일본 내 양심 세력과 연대하기보다는 담화 자체에 분노했다. 고노 담화 중에 “(일본 정부의) 이번 조사 결과 장기간, 그리고 광범위한 지역에 위안소가 설치돼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것이 인정됐다.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마련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옛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여했다. (…) 또한 전지(戰地)에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에 관해서는 ‘일본을 별도로 하면’(작은 따옴표는 필자) 한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당시의 한반도는 우리나라의 통치 아래에 있어 그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행해졌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일본의 이러한 전향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의 여성운동은 “일본을 별도로 하면”이라는 문구를 문제 삼았다. 여성운동은 ‘공창 출신이 많은 자발적인 일본인 위안부’와 ‘강제로 끌려간 우리’는 다르다며, 일본인 위안부를 이 보고서에 집어넣은 것은 강제 종군 위안부의 성격을 흐리기 위함이라고 반박했다.
군 ‘위안부’가 국적, 계급, 지역 등에 따라 개인의 고통이 달랐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예를 들면 2차 세계대전 전후 모두 일본인 위안부와 한국인 위안부의 자국에서 지위는 전자가 훨씬 가혹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위안부’ 제도 자체를 비판하기보다는, 강제와 자발성 여부로 구분하는 일제의 논리를 한국 사회도 답습했다는 것이다.
이는 가부장제 사회의 기본 지배 원리인 섹슈얼리티를 매개로 여성을 이분화하는 전형적 방식이다. ‘돈을 벌러 자원한 매춘 여성’(일본인 위안부)과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간 순진한 피해 여성’(조선인 위안부)이라는 이분법은 실제 역사적 사실도 아니다. 무엇보다, 당시 한국 사회의 여성에 대한 인식을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위안부’를 대변하는가
제12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인 14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인근에서 제1661차 일본군성노예문제해결을위한정기수요시위가 열리고 있다. 위안부 기림일은 고 김학순(1997년 사망) 할머니가 자신이 겪은 피해 사실을 증언해 위안부 피해자의 존재를 처음으로 공개적인 알린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김창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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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문제는 일본 측이 ‘위안부’ 해결 방식의 하나로 고안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이다. 국민기금은 자민당·일본사회당·사회민주당 연립 정권인 무라야마 내각이 출범한 1995년 7월 발족하여, 같은 해 12월에 총리부와 외무성이 공동 관리하는 법인으로 설립되었다.
태평양전쟁 중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군 ‘위안부’로 동원되어 피해를 입은 여성들에 대한 보상 사업과 여성의 명예와 존엄 등과 관련된 당대 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재단이다. 민간 반, 정부 반으로 구성된 이 기금에 대해, 한국 사회는 전적인 국가 보상이 아니라 일본 민간인의 성금이 동원되고, 피해자가 이 기금을 받는 것은 일본 측 논리인 ‘위안부 제도=성매매’를 인정하는 것이라며 격렬히 반대했다. 기금 수령을 보상이나 배상으로 생각하기보다 매춘 인정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나 역시 당시 그렇게 생각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별세…남은 생존자 9명
그러나 공식적 차원에서 운동단체가 이 기금에 반대할 수는 있어도 극한의 빈곤 속에 있던 피해 여성이 개별적으로 수령한 것에 대한 비난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한 기금 수령 거부에는 운동단체 혹은 한국 사회가 모든 피해자를 대변한다는 논리가 전제된 것으로, 사회운동과 피해자와의 관계 전반에 대한 많은 논쟁거리를 요구한다.
세 번째 사건은 2020년 5월25일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대협)의 불투명한 회계 의혹과 기존의 운동 방식을 비판적으로 증언한 인권운동가이자 당사자인 이용수님의 기자회견이다. ‘위안부’ 운동 주변에서는 “터질 것이 터졌다”는 위기감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솔직하지 않았다. 이용수님의 말에 대한 진보진영의 반응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조·중·동의 음모다” “조직에 문제가 있더라도 사회운동이 타격을 받아서는 안 된다” “갈등을 극복하고 다시 뭉치자”, 심지어 “치매다”라는 언설까지 등장했다.
당사자, 피해자의 말에 대한 경청과 존중보다는 진영논리가 앞섰고, 이용수님의 문제제기를 다룬 논쟁보다는 사회운동의 정당성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위안부’는 과거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쟁, 한·일관계, 피해와 가해를 둘러싼 윤리, 식민지배 이후에도 지속되는 식민주의, 일상의 성폭력 등 인간 문명 전반의 주제다. 따라서 ‘위안부’ 문제는 여성 문제, 일제강점기 문제에 국한하지 않는 보편적인 논쟁거리로 인식해야 한다.
사회운동을 되돌아보는 일은 어려운 일이요, 어떤 면에서는 아픈 일이다. 아쉬움을 넘어 새로운 논의의 장이 열리기를 희망한다.
▼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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