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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 (목)

이슈 검찰과 법무부

바람 핀 남편의 치밀한 아내 살해…3년 만에 범인 찾은 檢 수사[법조 Zoom In : 사건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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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기소, 재판 등 사법 작용의 대상이 되는 일’. ‘사건’의 사전적 정의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이 순간에도 사건은 벌어지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법조팀 기자들이 전국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 중,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건 이야기들에 대해 더 자세하게 풀어보겠습니다. 첫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


2020년 6월 2일 오후 2시. 굵은 빗방울이 내리치는 을씨년스러운 날이었다. 경기 화성시 119구급상황관리센터에 다급한 신고가 접수됐다.

“여기 송라리 저수지 쪽인데요.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차에 불이 붙었고, 동승자는 차에서 내렸는데 숨을 안 쉽니다.”

인적이 드문 산길에서 도로를 이탈해 나무를 들이받은 승용차에 불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양쪽으로 나무가 빽빽이 솟아 있고, 오가는 차량은 거의 없는 으슥한 2차선 산길이었다. 차에서 내린 남편 박명진 씨(가명)는 운전석에서 의식을 잃은 아내 김미현 씨(가명)를 겨우 구출해낸 다음 119에 신고했다.

소방대원들의 출동에도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불은 차를 모두 태우고 뼈대만 앙상하게 남겼다. 아내 김 씨는 끝내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13일 뒤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교통사고 충격으로 뇌에 산소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서 발생한 ‘저산소성 뇌손상’이 사인이었다. 경찰이 아내가 운전했다는 박 씨의 진술 등에 따라 운전미숙으로 인한 단순 교통사고로 사건을 송치하면서 사건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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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수원지검 안양지청 오세진 검사가 동아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허동준 기자 hung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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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의 단서 ‘내연녀’, ‘꺼져 있는 블랙박스’

사건을 넘겨받은 수원지검 안양지청 수사팀의 눈에는 모든 게 이상해 보였다. 김 씨의 입 속은 누군가 강하게 입을 누른 것 마냥 살점이 뜯어져 있었다.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이라도 친 듯 김 씨 손에는 할퀸 자국들이 선명하게 패어있었다. 운전자가 의식을 잃을 정도로 큰 사고였는데, 조수석에 동승한 박 씨는 통원 치료만 받으면 될 정도로 부상의 강도가 약했다는 점도 수상했다. 김 씨의 여동생 미진(가명) 씨가 경찰 수사에서 한 진술은 단순 교통사고가 아니라는 점에 확신이 들게 했다.

“형부의 바람으로 언니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사고 한 달 전엔 저한테 ‘남편이 차에 타자마자 블랙박스를 끄고 네비게이션도 끈 채로 이상한 산길에 간다. 나 죽이고 보험금 타려는 거 아닌가 무섭다’ 이런 말을 했어요”

남편의 바람, 작동하지 않은 블랙박스, 보험금. 많은 단서들은 김 씨가 죽음에 이른 원인이 교통사고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했다.

사고 직후 심폐소생술로 다시 뛴 김 씨의 심장도 결정적 단서가 됐다. 보통 교통사고로 심장 등 몸에 충격이 오면, 뇌로 산소가 전달되지 못하면서 저산소성 뇌손상이 사인이 되기도 한다. 심폐소생을 해도 이미 심장은 망가진 후라 심장은 다시 뛸 수 없다. 반면 심폐소생술로 며칠간 생명을 이어간 김 씨의 경우는 교통사고 충격이 아닌 다른 원인으로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치과의사 자격을 보유한 수사팀 오세진 검사(41·사법연수원45기)는 “응급실 기록에도 심장이 멎을 정도로 몸에 타격이 없었다는 얘기를 듣고 교통사고에 의한 충격이 사인이 아닐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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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났던 경기 화성시 송라리 어사로. 사진 우측 가로등과 연석 사이 공간으로 차가 떨어지며 사고가 났다. 오세진 검사는 “우연한 사고로 떨어졌다기엔 너무 좁은 공간으로 차가 빠졌다”고 설명했다. 네이버지도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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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묘하게 가려진 범죄의 흔적

검찰의 보완수사 요구 끝에 경찰의 수사가 다시 시작됐고, 운전자가 김 씨가 아니라 박 씨였다는 점이 새롭게 드러났다. 수상한 점들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추가적인 범죄 정황까지 포착하지 못한 경찰은 박 씨를 무면허 운전으로 인한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송치했다. 우연인지, 치밀한 계획인지 알 수 없으나 박 씨는 아슬아슬하게 수사망을 피해갔다.

경찰이 사건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차가 전소된 상황이라 정확한 차량 화재 사고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도로에는 폐쇠회로(CC)TV도 없었다. 김 씨가 사고 직후 사망했다면 부검으로 정확한 사인을 밝혔겠지만, 사고와 사망 사이 약 2주의 간격은 이를 규명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검찰은 전문가들에게 법의학감정을 의뢰하며 본격적으로 사건에 뛰어들었다. 오 검사와 약사 자격을 보유한 윤치호 검사(38·변호사시험 11회) 등 의학 지식을 갖춘 검사들로 전담팀도 꾸렸다.

검찰은 총 4건의 법의학감정서를 통해 “김 씨가 교통사고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하기 어렵다”는 공통된 의견을 얻어냈다. 전문가들은 부검결과에 갈비뼈와 복장뼈의 손상 외에 교통사고의 흔적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갈비뼈와 복장뼈 손상도 사고 직후 이뤄진 심폐소생술이 원인으로 보였다. 병원 이송 당시 김 씨의 뇌 CT도 사고 시점을 감안하면 과도하게 손상돼 있었다. 교통사고 발생 전 뇌손상이 시작됐다는 게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점이 많았다.

당시 감정서를 작성한 김문영 성균관대 해부학교실 교수는 “부검이 사고로부터 2주 후에나 이뤄져 사인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교통사고로 김 씨가 돌아가셨다면 당연히 있어야할 흔적이 없었다. 사인이 질식에 가깝지 않을까 추정됐다”고 설명했다.

● 탄력받은 검찰 수사

감정서를 바탕으로 검찰 수사는 박 씨의 살인을 입증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 과정에서 보험 결제 계좌를 분석한 결과 박 씨가 김 씨의 명의로 몰래 여행보험에 가입한 내역이 나왔다. 사고가 벌어지기 하루 전인 2020년 6월 1일 보험 기간을 연장하기까지 했다. 자동차보험금 등으로 총 5억2300만 원을 편취한 박 씨는 여행보험금 3억 원까지 추가로 받으려 했다.

박 씨는 본인이 보험가입을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지만, 검찰은 보험을 가입한 PC의 IP 위치가 박 씨의 사무실인 것도 파악해 놓은 상황이었다. 오 검사는 “PC의 IP까지 제시하니 박 씨가 반박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이후 본인이 가입했다고 토로하면서 진술도 바뀌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검찰은 박 씨의 범행 동기도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금융거래내역 분석 등을 통해 박 씨가 당시 부동산 중개업을 하면서 거액의 채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박 씨는 보증금 ‘돌려막기’를 할 정도로 경제 사정이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검찰은 박 씨가 아내를 살해하기 전까지 사고 현장을 약 20차례 사전 답사한 정황도 포착했다. 박 씨는 주거지와 사무실에서 약 1시간 거리 떨어진 이 곳을 오고 갈 때마다 블랙박스를 꺼뒀다. 박 씨는 당초 “가족들과 사이가 좋아서 여행을 자주 다녔고, 다음에 그쪽으로 캠핑을 가려고 캠핑 사전 답사를 한 것”이라는 취지로 주장을 했지만, 검찰은 유가족 등 참고인 조사를 통해 박 씨에게 10년이 넘는 장기간 내연녀가 있었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윤 검사는 “내연 관계와 경제적 궁핍이 박 씨를 내몬 것으로 보였다”며 “법의학감정에 따른 밝혀진 사인과 범죄 동기들을 종합했을 때 살인으로 결론을 내리기 충분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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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수원지검 안양지청 윤치호 검사가 동아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허동준 기자 hung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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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만에 구속기소… 현재 진행형인 재판

검찰이 증거를 제시할 때마다 박 씨의 진술은 흔들렸다. 검찰은 전방위적인 수사를 통해 다양한 증거를 확보했다. 김 씨의 음성 녹음파일과 문자내역, 박 씨와 내연녀와의 통신자료 분석물 등을 제시하며 3차례나 조사를 이어갔다.

법의학감정서 외에도 도로교통공단을 통해 차량의 위치와 충격 정도를 고려할 때 차가 천천히 이동해 나무와 부딪힌 것으로 추정된다는 감정서도 받았다. 경찰에 수사 단계에서 “도로에 짐승이 뛰어들어 이를 피하다 사고가 났고 나무에 들이받아 아내가 정신을 잃었다”고 한 박 씨의 진술과 배치되는 것. 인근 지역 베테랑 견인차 차량기사를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하며 해당 지역에는 낮에 산짐승이 지나지 않는다는 진술도 확보했다.

결국 검찰은 지난해 7월, 사건 발생 3년 여 만에 박 씨를 구속 기소했다. 우연과 계획이 교묘하게 겹쳐지며 미궁에 빠질 뻔했던 수사가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오 검사는 “그래도 최소한의 할 것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 용기 있는 유가족들의 증언 덕분에 사건이 시작됐고, 많은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엉켜있던 사건의 실마리가 풀렸다”고 소회를 밝혔다.

박 씨의 사건은 현재 진행형이다. 1년 가까이 진행된 재판에서 박 씨는 여전히 살인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언니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김 씨의 여동생들은 매번 박 씨의 재판을 방청하고 있다.

구민기 기자 koo@donga.com
허동준 기자 hung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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