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 명동 주름잡은 주먹…“낭만과 주먹 모두를 갖춘 협객이 떠났다” 애도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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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한기홍 기자가 대신 쓴 회고록 '주먹으로 꽃을 꺾으랴'(2013)를 보면 1932년 서울 관수동에서 태어난 고인은 숭실고등보통학교를 중퇴했고, 6·25 당시 대구 특무부대에서 1등 상사로 근무한 경력 때문에 '신상사'라는 평생의 별명을 얻었다.
1954년 대구에서 상경한 뒤 명동 중앙극장 옆에 둥지를 틀었다. 우미관의 김두한, 명동의 이화룡, 종로파(나중엔 '동대문파'로 불림)의 이정재가 3각 구도를 이룰 때였다.
고인은 독자 조직을 꾸리며 명동연합에 느슨하게 결합했다. 1958년 9월 '충정로 도끼 사건'으로 구속된 적이 있다. 1960년대 중반 조직을 재건한 뒤 1970년대까지 명동을 장악하고 신상사파 보스로 활동했다. 당시는 회칼로 무장한 조직폭력배가 등장하기 전이었다.
'주먹으로 꽃을 꺾으랴'에 따르면 신상사는 "탁월한 발차기 실력, 번개 같은 선제공격, 단호하고 과감하게 상대의 눈을 순식간에 찌르며 급소를 가격하는 능력이 출중"했다. 마산의 전설적인 주먹 구달웅, 서순종 전 세기프로모션 회장 등이 부하였다.
일본 야쿠자 조직과 함께 관광호텔 카지노를 운영해 수입을 올렸지만 마약과 사채, 유흥업소 관리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이 때문에 1990년 노태우(1932∼2021)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벌였을 때도 신상사의 명동 조직은 거의 피해를 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주먹으로 꽃을 꺾으랴' 머리말에 "이익을 탐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저는 잘 모르는 분야는 쳐다보지 않았고, 범죄꾼과의 결탁은 한사코 반대했습니다. 제가 말년에 이르기까지 주변 사람들의 구설에 크게 오르지 않은 이유였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적었다.
1975년 1월 신상사파가 범호남파 조양은 등에 습격당한 '사보이호텔 사건' 이후 상대의 사과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합의서를 써줬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이날 1970년대 서울 명동을 장악한 '신상사파' 두목 신상현 씨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는 조문객들과 각계에서 보낸 화환이 줄을 이었다.
이따금 정장을 입은 건장한 체구의 남성들이 허리를 굽혀 "형님, 오셨습니까"를 외치며 '90도 인사'를 하는 장면이 목격됐다. 인사를 받은 남성들은 반갑게 악수하며 "어디 식구냐"고 묻기도 했다. 신씨의 지인들은 "낭만과 주먹 모두를 갖춘 협객이 떠났다"고 애도했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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