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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0 (화)

[김창균 칼럼] 올림픽 덕에 눈 비비고 다시 보게 된 ‘뉴 코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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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으로 발언권 쟁취 안세영

“자신 없나” 선배에게 호통치고 대신 나서 5:0 득점한 도경동

패자 품격 감동 준 스무 살 ‘삐약이’

당차고 쿨하며 때로는 맹랑한 1020세대의 신선 발랄 활약상

조선일보

김창균 논설주간


조선일보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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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수의 올림픽 결승전을 이렇게 마음 편하게 본 적이 없다. 승패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기량 차가 뚜렷했다. 여자 배드민턴 단식 결승전은 일찌감치 개막한 ‘안세영 시대’를 확인받는 자리였다.

영광스러운 대관식 현장에서 안 선수는 ‘폭탄 발언’을 했다. 자신의 부상에 안일하게 대처해 온 협회에 실망과 불신을 내비치며 “대표팀과 결별하겠다”고 했다. 언론과의 후속 인터뷰에서 안 선수는 태극 마크를 단 2018년부터 대표팀 운영에 문제를 느꼈다고 했다. “제가 목표를 향해 달려온 원동력은 분노였다”면서 “목소리를 높이고 싶은 게 제 꿈이었다”고 했다. 납득이 안 되는 기성 체제에 항변할 수 있는 발언권을 얻기 위해 실력을 키웠고 금메달을 딴 순간 그 목소리를 터뜨렸다는 뜻이다. ‘튀면 죽는다’를 삶의 지혜 삼아 위계질서에 순응해 온 세대는 꿈도 못 꿔본 일이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축제 현장에서 꼭 그래야 했느냐”는 비판과 “충격을 극대화할 기회를 잘 포착했다”는 응원이 맞서고 있다.

올림픽에서 문제 협회만 드러난 건 아니었다. 한국 양궁은 올림픽 금메달 5개를 싹쓸이했다. 양궁은 “전 세계 선수들이 모여서 한국에 금메달 주는 행사” “한국을 마지막에 만나는 팀이 은메달 가져가는 경기”라는 농담까지 나왔다. 이번 대회 3관왕, 역대 금메달 합계 5개인 김우진 선수는 “한국 양궁은 왜 강하냐”는 질문에 “모든 선수가 똑같은 위치에서 출발한다”며 공정한 선발 시스템을 꼽았다. 3년 전 도쿄 올림픽 3관왕 안산 선수마저 선발전에서 밀리면서 출전권을 얻지 못한 이유다.

한국 남자 펜싱 사브르 단체전 3연패의 주인공 구본길(35) 선수는 8강전이 끝난 후 라커룸에서 도경동 선수(25)에게 “혼났다”면서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 했다. “왜 자신 없이 플레이를 하느냐. 내가 뒤에 받치고 있으니 마음 놓고 공격하라”고 격려한 것을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올림픽 무대에 처음 나온 후보가 열 살 많은 베테랑에게 ‘직언’을 날렸다는 게 신기했다.

도 선수는 결승전에서 30대29 한 점 차로 쫓긴 승부처에서 구본길 대체 선수로 나섰다. 이번 대회 첫 출전이었지만 거칠 것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28초 만에 실점 없이 다섯 점을 연속으로 따냈다. 한국팀에 45대41 승리를 안긴 결정타였다. 도 선수는 시합 후 “질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여자 사브르 단체 준결승에서 세계 랭킹 1위 프랑스를 꺾은 주역도 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전하영(23), 최세빈(24) 막내들이었다. 이들은 개인전에서 금, 은메달을 차지한 프랑스 1, 2 검객을 몰아붙이며 점수 차를 벌렸다. 대표팀을 이끌어온 맏언니 윤지수(31)는 경기 막판 전은혜(27) 선수를 자기 자리에 대신 출전시켰다. “앞으로 대표팀을 이끌 후배들이 경험을 쌓는 것이 맞다”고 했다.

새내기들이 겁없이 돌진하고 선배들은 ‘라때’ 타령 없이 밀어주는 팀워크, 선수가 선발 시스템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시스템이 파리 무대에서 K스포츠를 떨친 배경이었다. 인맥, 파벌, 과거 명성에 따른 선수 선발로 잡음을 일으킨 일부 구기 종목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칼’과 ‘활’에 이어 ‘총’에서 금메달을 쓸어 담은 건 2000년대생 여자 3총사였다. 17세 막내 반효진은 “오늘의 운세가 ‘모두가 나를 인정하게 되는 날’이었다”고 했다. 19세 오예진은 “엄마가 지금 울고 있을 거다. 엄마 봤나”라며 환하게 웃었다. 21세 양지인은 마지막 슛오프가 긴장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개최국 프랑스 선수가 더 떨었을 걸요”라고 했다.

탁구 신유빈 선수는 단식 3, 4위전에서 일본 선수에게 4대2로 졌다. 한일전은 꼭 이겨야 한다는 쉰내 나는 감각이었다면 분을 못 이기고 씩씩거렸을 것이다. 신 선수는 패배가 확인된 순간 상대방에게 먼저 다가가 축하를 건넸다. 일본 네티즌들은 “응원하고 싶은 선수” “젊은데 멋진 스포츠맨십”이라고 했다. 신 선수는 인터뷰에서 울음을 억누르며 “상대가 모든 면에서 나보다 앞섰다. 그런 실력과 정신력과 체력을 갖추기 위해 얼마나 더 노력했을지 인정한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련하다”고 했다. 스무 살 ‘삐약이’는 너무나 어른스러웠다.

당초 기대치와 관심이 낮았던 올림픽이었다. 그러나 1020 젊은이들이 전해오는 경기장 안팎의 활약상이 다시 눈길을 잡아끌었다. 당차고 쿨하고 때로는 맹랑하기까지 한 ‘뉴 코리안’들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김창균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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