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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잘난 유전자, 내 소유가 아니면 누구 건데?[최정균의 유전자 천태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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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유전자 수지부모(受之父母)

경향신문

영화 <가타카>의 한 장면. 1997년 제작된 이 영화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완벽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 우대받는 반면 ‘열성’ 유전자를 안고 태어난 사람들은 차별을 받는 디스토피아적인 사회를 공상했다. 생물학적으로 유전자와 그것이 만들어낸 생산능력은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유전자가 사고 팔 수 있다거나 소유의 대상이 되면 차별과 특권을 모두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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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정보, 조상들에게 받아
생명체가 스스로 만들지 못해
새 ‘변이’는 오류의 산물일 뿐
오히려 유전자가 우리를 ‘생산’

DNA는 공유할 때 의미 생겨
난치병 치료 단서 ‘크리스퍼’도
수많은 사람들 정보 비교 필요
‘소유’ 인정 땐 차별·특권 불가피

본 연재의 두번째 글 ‘위대한 동물, 호모 이코노미쿠스’(경향신문 2023년 8월23일자 14면)에서 한 유전자 검사 회사의 언뜻 정당해 보이는 사업이 어째서 경제학적으로 착취에 해당하는지 살펴본 바 있다. 유전자 검사라는 생산행위에 대한 정당한 이득은 고객에게서 받는 서비스 비용에 한정되어야 하며, 단순히 유전자 정보를 취합해 제약사에 넘기고 받은 수천억원은 부당한 이득이라는 점, 또한 이러한 데이터의 생산은 과학계에서는 질병의 진단과 치료라는 공공의 목적을 위해 이미 해오던 작업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 제약회사들은 왜 공공의 데이터를 사용하지 않고 비싼 비용을 지불하면서 이 회사의 데이터를 사가야만 했을까? 그것은 데이터의 양 때문이다. 수집된 유전자 정보의 양, 즉 자신의 DNA 샘플을 제공한 사람의 숫자도 많거니와 ‘연구 목적’이라는 명목하에 갖가지 건강 정보를 모두 공개해준 것이다. 과학자들이 ‘진짜’ 연구 목적으로 혈액을 기증해달라고 하면 선뜻 응할 사람도 많지 않거니와 연구하고자 하는 대상 질병 외에 다른 건강 정보까지 순순히 내주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내 유전자가 나의 소유라고 여기기 때문에 공공의 목적으로 내놓을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난 글 ‘복권당첨자를 숭배하는 세상’에서는 ‘능력주의(meritocracy)’를 유전학적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능력자들에게 대중이 열광하는 이유와, 집단의 전체 가치를 놓고 벌어지는 제로섬 게임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한 이유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을 시도했다. 특히 재능뿐만 아니라 성취욕, 끈기, 집념과 같이 성공에 필요한 자질들이 모두 유전자에 의해 타고난다는 점을 들어 능력주의가 왜 부당한지를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자신의 유전자를 본인의 소유라고 주장한다면 이러한 비판도 일정 부분 근거를 잃게 된다. 캐스린 하든 교수는 ‘유전자 로또’라는 비유를 사용했지만 복권에 당첨되어 받은 상금은 당첨자의 소유가 된다. 마찬가지로 유전자의 소유권을 인정한다면, 단지 “운이 좋았던 것 가지고 으스대지 마라” 정도의 비난만 성립될 뿐이다.

그러면 생물학적으로 볼 때 정말 유전자에 소유권이 주어질 수 있을까? 따로 사실 여부는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포항공과대학교 생명과학과에서 조선시대 단발령에 대한 당대 성리학자들과 백성들의 반발을 생물학적으로 반박해보라는 문제가 출제된 적이 있는데, 교수가 생각한 모범답안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단발령에 대한 반발의 근거는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몸과 머리털과 피부는 부모에게 받은 것)’로 요약될 수 있으나,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최초의 세포는 세포분열을 통해 사라지고 우리 몸을 이루는 체세포들은 내가 획득한 자원과 에너지를 투입해 전부 새로 만들어낸다. 따라서 신체발부를 부모에게서 물려받는다고 볼 수는 없다. 내 몸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아니다. 그럴듯한 논리다.

하지만 유전자-물리적 DNA로서가 아니라 유전정보로서의 유전자-는 어떨까? 우리 몸을 이루는 모든 세포는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정보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유전자 수지부모는 반박할 수 없는 진리다. 우리는 아버지로부터 50%, 어머니로부터 50%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상속의 개념을 도입하려 해도 문제가 발생하는데, 유전자는 누구도 스스로 만들어낸 적이 없으므로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부모 역시 스스로 유전자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또 그들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 즉 우리가 지닌 유전자는 조부모로부터 각각 25%씩을 물려받은 것이며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모든 생명체의 공통 조상에까지 도달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 생겨난 정보, 즉 변이는 모두 오류로 인해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자원과 에너지를 투입해 체세포를 ‘생산’하는 과정과 다르며, 라마르크가 주장했던 ‘획득’형질의 유전과도 다르다. 어떠한 생명체도 유전자를 ‘생산’하거나 ‘획득’한 적이 없다. 그 반대로 오히려 유전자가 자신의 전달체로서 우리를 ‘생산’해낸 것이다.

경제학적으로도, 정당한 소유란 오직 자기 자신의 노동으로 생산한 가치에 대해서만 주장할 수 있는 권리다. 왜곡된 의미의 모든 소유에 대해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은 <소유란 무엇인가>에서 한마디로 ‘도둑질’이라고 답한다. 지대라고 불리는 다양한 형태의 불로소득이 정당화되는 것은 토지, 자본, 노동자 자체가 생산적이라는 경제학의 명제 때문이다. 즉 생산에 기여하는 토지, 자본을 빌려주고 그 대가를 받는 것은 정당하다고 보는 것인데, 엄밀하게 보면 토지도, 자본도, 심지어 노동자도 그 존재 자체로는 그 무엇도 생산할 수 없다. 지난 글 ‘위대한 동물, 호모 이코노미쿠스’에서 정의했듯이 지대란 생산공간(땅, 공장, 상가건물 등), 생산수단(기계, 자본 등), 생산자 거주공간(집)을 선점하고 거기서 생산된 가치 중 일부 혹은 대부분을 불로소득의 형태로 착취해 가는 것인데, 프루동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도둑질’이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생산을 행하는 노동자 그 자체도 누군가의 소유는 될 수 없다는 점인데,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유전자와 그것이 만들어낸 생산능력도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논리와 일치한다. 현대사회에서 사용되는 소위 ‘몸값’이라는 표현은 생산능력 자체에 가치가 매겨지고 소유화될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데, 이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피고용인으로서 고소득을 창출하는 현대사회의 능력자들은 ‘노동자’라는 말 대신 ‘인적 자본’으로 포장되어 자본가의 착취를 당하거나 심지어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자기 착취는 우리가 흔히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착취, 즉 과도한 부려먹기로 스스로를 혹사하는 경우에서 볼 수 있다. 프루동은 특출난 재능의 소유자라 해도 평범한 사람이 같은 노동시간을 투입해 벌어들이는 몫과 동일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소유하고 마르크스적 잉여가치를 가져가는 것을 착취라고 한다면, 노동자 스스로가 자기의 재능을 소유하고 비교우위적 잉여가치를 가져가는 것 역시 착취라고 볼 수 있다.

이 모든 논리가 너무 형이상학적이라고 생각된다면 좀 더 현실적인 면을 살펴보자. 바로 자기 유전자를 혼자 ‘소유’하고 있어봐야 실제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다른 사람들과의 ‘공유’를 통해서만 비로소 가치가 창출된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유전자의 소유권을 100% 온전하게 주장하며 그 누구도 공공의 연구 목적을 위해 공유하지 않는 사회가 있다고 하자. 이런 사회에 속한 과학자들은 어떤 유전자가 어떤 질병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다. 그런 연구를 수행하려면 각각의 질병을 가진 환자와 해당 질병을 가지지 않은 정상인을 수만명에서 수백만명까지 모아서 그들의 유전자 변이를 비교 분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런 방법으로 암, 치매, 고혈압, 당뇨, 비만, 자폐, 우울증, 불면증을 비롯한 수백 가지의 각종 질환에 대한 위험요소들이 발굴되어왔다. 자신의 유전자를 제공한다고 해서 당장 치료 방법이 개발되고 본인에게 혜택이 돌아오는 것은 아님에도 이렇게 자발적으로 자신의 유전정보를 공개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의학의 발전은 결단코 없었다. 유전자 검사 서비스로 경제적 이득을 얻은 자본가들은 물론, 자기 유전자에 있는 다양한 위험요소에 대한 정보를 얻어간 개인 고객들도 바로 이러한 기증자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점은 아마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진단에서 치료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유전자 가위라고도 불리는 ‘크리스퍼(CRISPR)’ 기술이 질병 치료의 패러다임을 바꾸려 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22년 PCSK9이라는 유전자에 대한 임상시험이 시작되었는데, 만약 이 치료법이 성공하면 사람의 유전정보를 바꾸어 콜레스테롤 수치를 영구적으로 낮춰준다. 스타틴과 같은 약을 죽을 때까지 먹어야 할 필요가 없어질 뿐 아니라, 향후에는 콜레스테롤이 원인이 되는 심근경색, 뇌졸중, 고혈압, 치매 등 각종 질환의 예방 목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일종의 유전학적 예방접종이다. 그런데 이 획기적인 치료의 역사는 2003년 ‘네이처 유전학’ 논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족성 고콜레스테롤혈증을 앓던 프랑스의 23개 가족 집단의 유전자 분석 결과로 발견된 것이 바로 PCSK9이었던 것이다. 이 논문의 말미에 있는 감사의 글은 “연구에 협조해주신 가족분들 덕분입니다”로 시작한다.

암의 경우도 수많은 암환자들의 암세포를 환자 동의하에 분석해 이미 엄청난 치료기술의 진전을 이뤄냈다. 기존의 항암치료는 빠르게 분열하는 세포를 무작위적으로 죽이는 과정에서 정상세포에도 해를 끼쳐 환자들이 상당한 부작용을 감당해야 했으며 결국 치료에 대한 저항성이 발생하면 별다른 치료법 없이 죽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최근 개발된 표적치료와 면역치료는 각 환자의 암조직을 분석해 특정 유전자에 변이가 있는 경우 해당 유전자를 공략하게끔 함으로써 기존 치료에 반응하지 않던 환자들에게 새로운 치료법을 제공함과 동시에 부작용도 최소화한다. 혈액암 치료제인 글리벡이 개발된 이후 EGFR, BRAF, MEK1/2, BRCA1/2, PD-L1, CD19 등 많은 유전자들이 표적치료 및 면역치료의 치료 혹은 진단 타깃으로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다. 물론 기증자들은 이러한 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망했겠지만 그 덕분에 수많은 환자들의 생명이 연장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유전정보를 개인정보로 간주해 법적인 보호를 하는 실질적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다양한 질병의 발생 가능성으로 인해 의료 혜택에 있어서 당할 수 있는 차별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제46조 제1항은 “누구든지 유전정보를 이유로 교육·고용·승진·보험 등 사회활동에서 다른 사람을 차별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사실상 유전자에 의해 생긴 ‘보여지는’ 형질에 대한 차별은 인간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영화 <가타카>의 주인공 빈센트는 열성 유전자로 인해 차별을 받고 살다가 DNA 중개인을 통해 우성 유전자를 ‘구입’한다. 차별은 특권(혹은 ‘meritocracy’의 merit에 해당하는 것)의 다른 얼굴이다. 유전자가 사고팔 수 있는 소유의 대상으로 간주된다면 차별과 특권 모두 피할 수 없다. 열성 유전자에 의한 차별을 원치 않는다면 우성 유전자에 대한 특권도 포기해야 한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지주들이 자연물인 땅과 거기서 나오는 산물에 대해 지대를 부과하는 것을 비판한 바 있다. 구약성서는 땅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현대 생물학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유전자와 그것이 만들어낸 생산능력은 자연의 것 혹은 하나님의 것이다. 혹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최정균 교수

경향신문

카이스트 교수로 2009년부터 재직하며 인간유전체학을 연구하고 있다. 연구목표는 암을 비롯한 여러 질병의 유전학적 원인 규명과 진단 및 치료기술 개발이며, 진화론을 접목하고 인공지능(AI)을 활용하는 데 관심이 많다. 아산의학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선정 과학기술인상을 포함해 여러 학회의 학술상을 수상하였고, 과학기술한림원 선도과학자, 포스코사이언스펠로십에 선정된 바 있다.


최정균 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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