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84세인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어떤 이는 그를 한국 정치에서 보기 드문 현자(賢者)로 칭송하지만, 그를 지독한 에고이스트(egoist)라고 비난하는 이도 있다. 다만 김 전 위원장을 꺼리는 이들도 민심을 꿰뚫고 판세를 내다보는 그의 정치 감각엔 토를 달지 않는다. 그는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의 손자로 20대 때부터 현실 정치와 접촉한 이래 60여 년간 권력의 핵심들과 인연을 쌓았다. 박근혜·문재인·윤석열 정권의 탄생에 관여했지만 결국 각 대통령과 전부 척을 지고 만 그의 정치 후일담을 들어봤다.
김종인(84)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보다 두 살 젊은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인지능력 저하 논란에 휩싸여 대선 출마를 포기했다. 하지만 김 전 의원장에게 그런 기미는 전혀 안 보였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인터뷰이일수록 질문지를 미리 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 전 위원장은 그런 요청을 하지 않았다. 어떤 질문이든 즉석에서 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일 터다. 실제로 그의 답변은 거침이 없었고 확신에 차 있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에서 윤석열 대통령까지 아우르는 정치의 관록이 느껴졌다. 인터뷰는 지난달 29일 오후 그의 서울 광화문 개인 사무실에서 100분가량 진행됐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정부·여당이 어려운 경제 상황을 해소하는데 노력했다면 22대 총선의 선거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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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김 전 위원장은 진영을 넘나들며 비례대표로만 5선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정치적 유연성일 수 있지만 ‘무원칙한 양다리’로도 볼 수 있지 않나.
A : “내가 개인 영달을 위해서 그런 게 아니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한국도 일본처럼 보수 장기 집권으로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민주당이 위기였다. 문재인 대표가 우리 집에 와 ‘살려달라’고 매달렸다. 민주당이 무너지는 건 민주주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도와준 것이다. 2020년에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이 된 것도 탄핵과 21대 총선 참패로 완전히 망가져 버린 보수를 되살리려 한 것이다. 당시 내가 5·18 묘역에 가서 무릎 꿇고 사죄를 하면서 호남이 조금씩 마음을 연 덕분에 윤석열 대통령이 0.7%라도 이긴 것이다. 그래도 박근혜·문재인·윤석열 대통령 모두 취임 후에 고맙다는 전화 한 번 없었다.”
■ ‘김종인의 정치’란 무엇인가
보수·진보 한쪽 망하는 건 바람직 안 해
국민의힘·민주당 어려울 때 나선 이유
약속 어겨 정권 무너져…계속 반복 한심
할아버지에게 “할 말은 해라” 배워
Q : 도와준 후보들이 대통령은 됐는데 결국 다 실패하거나 위기를 맞고 있다. 결과적으로 김 전 위원장의 정치도 실패한 셈 아닌가.
A : “나의 잘못이라기보단 그 사람들이 정직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다. 처음에 나한테 말할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대통령이 되니까 사람이 변한다. 초심을 계속 유지했으면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이런저런 일을 하겠다고 공약을 했으면 그걸 지켜야 한다.”
여의도에서 그에 대한 주된 불만 중 하나는 너무 개인 주장이 강해서 도무지 남들과 타협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그는 언성을 높였다.
“나는 할 말은 해야 한다는 것을 할아버지(가인 김병로 선생)한테 많이 배웠다. 내가 박근혜 후보를 도왔을 때가 72세, 문재인 대표를 도왔을 때가 76세,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비대위원장을 맡은 게 80세 때다. 내가 그 나이에 무슨 한자리를 얻겠다고 나선 게 아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 급할 때는 이런 거 저런 거 다 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목적을 달성하면 전부 했던 말을 까먹더라. 나는 약속을 지키자고 말한 것뿐이다. 약속을 안 지켜서 매번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도 그게 다음 정권에 또 반복되니 한심하다.”
자연스레 윤석열 대통령 쪽으로 화제가 옮아갔다. 그는 윤 대통령 부부와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소개했다.
“2021년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끝나고 다음 날 내가 국민의힘에서 나왔다. 그런데 그날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게 연락이 와서 ‘드릴 말씀이 있으니 꼭 뵙고 싶다’고 했다. 일주일 뒤에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약속 하루 전날 윤 전 총장이 제삼자를 통해 약속을 취소했다. 아마 나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석 달쯤 지나 김건희 여사가 전화를 해 자기 남편을 도와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얼마 뒤에 아크로비스타 지하의 식당에서 만났는데 그때 윤 전 총장 부부가 함께 나왔다. 김 여사는 20분쯤 앉아 있다가 먼저 일어섰고 단둘이 얘기하는 자리에서 윤 전 총장이 ‘앞으로 도와주시면 잘 따르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도와주기 시작했는데 윤 전 총장이 대통령 후보가 되니까 마음이 바뀐 것 같다.”
■ 윤석열 정부의 위기, 어떻게 보나
대통령이 다 할 수 있다는 건 착각
맨날 똑같은 사람 얘기만 들어 문제
야당과 최소한이라도 협치해야
Q : 여당이 22대 총선에 참패한 이유가 뭐라고 보나.
A : “대개 이종섭 전 장관을 호주로 보낸 것 때문이네, 김건희 여사 명품백 때문이네 하지만 나는 경제정책 실패가 근본적 요인이었다고 본다. 지금 자영업자, 소상공인, 서민들이 먹고살기가 굉장히 힘들다. 정권이 바뀌었으면 뭔가 달라지겠다고 하는 기대가 크기 마련인데 이 정부는 재정건전화를 내세우면서 각자 알아서 먹고살라고 해버린 것이다. 그러니 정부에 대한 반감이 안 생길 수 없다. 재정적자를 너무 죄악시하면 안 된다. 꼭 필요한 곳엔 돈을 써야 한다.”
Q : 윤석열 정부가 여소야대 때문에 어렵다. 윤 대통령에게 전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A : “대통령에게 주어진 헌법상 권한을 가지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야당과 최소한도의 협치라도 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전혀 없다. 또 맨날 똑같은 사람들만 불러다가 얘기 듣지 말고 다른 얘기를 하는 사람들의 말을 좀 들어야 한다. 특히 관료들은 대통령의 성공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 사람들은 다음 정권에서도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자기 마음대로 후계자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Q : 대통령실이 뒤늦게나마 제2부속실을 만들겠다고 한다.
A : “김건희 여사의 성향을 볼 때 큰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 잡힐 거 같으면 진작에 자제했겠지.”
그는 최근 국민의힘 전당대회 과정에서 한동훈 대표에 대해 우호적인 발언을 해 눈길을 끌었다. 그 이유를 물었다.
“나는 애초부터 한 대표가 1차 투표에서 끝낼 것으로 예상했다. 다른 세 명의 후보는 자력으로 대표가 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한 대표가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비대위원장에서 물러났지만, 일반 국민은 총선 참패가 그 사람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다 안다. 총선은 윤석열 정부 2년에 대한 평가였던 것이고, 오히려 한 대표는 패배를 최소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당심과 민심 모두 변화를 바랐고 그래서 한 대표가 양쪽 모두에서 60%가 넘는 득표를 거뒀다. 마치 2021년 전대에서 이준석 대표가 당선됐을 때와 비슷하다.”
대통령 중임제
Q : 친윤 진영에선 한 대표에게 배신자 프레임을 씌웠는데.
A : “한 대표가 전대에 출마한 것은 차기 대통령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잘 돼야 한 대표도 대통령 희망이 있는 거지 윤 정부가 잘못하면 가망이 없다. 그러니 윤 대통령과 한 대표는 윤석열 정부의 성공이란 목표가 똑같다. 그러니 거기에서 어떻게 배신이 나올 수 있겠나.”
Q :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과 한 대표를 비교하면 어떤가.
A : “이 의원이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 승리에 기여했는데 국민의힘에서 쫓겨났다. 그래도 이번 총선에서 당선됐기 때문에 2027년 대선 때 유력 주자가 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됐다. 여기에 한동훈 대표까지 등장하면서 보수 진영의 세대교체 가능성이 훨씬 더 농후해졌다고 생각한다. 두고 봐야 하지만 한 대표와 이 의원이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경쟁할 수 있는 계기는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야당 얘기도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지금 더불어민주당이 윤 대통령 탄핵을 추진하는 데 대해 “아무리 대통령에 대한 불만이 많아도 대통령이 중대한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확인된 게 아무것도 없는데 탄핵이 될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Q :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가 지금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 1위인데 이런 추세를 차기 대선 때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A : “이 전 대표의 운명은 법원에 달렸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얘기할 수가 없다.”
Q : 만약 이 전 대표가 최종심은 아니어도 1, 2심에서 유죄가 나온다면 판세에 영향을 미칠까.
A : “그 정도로는 지지층이 크게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여당은 야권 대선후보가 이 전 대표란 점을 상수로 놓고 대응 전략을 짜야 한다.”
그는 역대 대통령들의 잇따른 실패가 대통령에게 너무 과도한 권력이 쏠리는 권력 구조에 기인하는 부분도 크다고 봤다. 내각제 등 대통령 권력을 줄이는 방향의 개헌이 꼭 필요하단 것이다. 대통령 4년 중임제는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러면 지금보다 더 엉망이 된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김정하 논설위원, 유성운 기자 wormho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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