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31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바르샤바 봉기 80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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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용서를 구한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31일 밤 폴란드 바르샤바의 크라신스키 궁 앞 광장에서 폴란드 국민 앞에 고개를 숙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저항한 유럽 내 최대 규모의 시민 항쟁이자, 나치가 폴란드에 저지른 최악의 전쟁 범죄로 꼽히는 ‘바르샤바 봉기’ 80주년을 하루 앞두고 나치의 만행에 대한 공개적 반성을 한 것이다.
바르샤바 봉기는 1944년 8월 1일부터 10월 2일까지 약 두 달간 폴란드 내 지하 저항군(국내군)이 나치 독일에 맞서 벌인 항쟁이다. 초기에는 시가지 상당 부분을 장악하며 승기를 잡는 듯했으나, 무기와 보급품 확보에 실패하면서 독일군에 밀렸다. 결국 9월 하순엔 해방시켰던 시가지 대부분을 다시 독일군에 빼앗겼다. 일부가 하수도 등 지하 공간에 숨어들어 계속 저항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항쟁 과정에서 국내군 1만6000여 명이 사망하고, 15만~20만명의 민간인이 나치 독일에 의해 학살됐다. 또 바르샤바 시내의 절반 이상이 파괴됐다. 남은 주민 중 약 20만명이 외지로 추방되거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폴란드 정부는 이번 주 바르샤바 시내 곳곳에 있는 전적지(戰跡地)와 학살 현장에서 기념식을 열고 당시 숨졌던 폴란드인들을 추모하고 있다. 이 중 가장 큰 대표 행사에 독일 대통령이 참석한 것이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바르샤바 봉기는 폴란드와 독일이 함께한 오랜 역사 중에서 가장 잔인한 시기였다”며 “독일이 1939년 9월 침공 이후 폴란드에 얼마나 큰 고통을 줬는지, 우리 독일인은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용서를 구한다”고 했다. 그는 앞서 바르샤바의 폴란드 저항군 전사자 묘역에서 생존자들을 만나 “독일인들은 역사적 책임을 인식하고 있다”고 사죄했다.
바르샤바 봉기의 실패는 당시 소련 육군의 ‘의도적 방관’으로 인해 초래됐다는 시각이 많다. 봉기가 시작됐을 무렵 소련군은 바르샤바를 향해 쾌속 진군하고 있었고, 9월 중순엔 바르샤바를 동서로 가르는 비스와 강 동쪽을 점령하고 서쪽 시가지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폴란드 국내군을 비밀리에 후원해 온 미국과 영국이 애타게 소련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소련군은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다. 폴란드 내 저항 세력이 미리 바르샤바를 해방시키면 소련군이 ‘해방군’ 역할을 못하고, 공산 괴뢰 정부인 ‘폴란드 민족해방위원회’의 정통성을 약화시킬 수 있어서였다.
이듬해 1월 바르샤바에 진주한 소련군은 살아남은 폴란드 저항세력을 처형하거나 수용소로 보냈다. 이후 들어선 공산 정권은 바르샤바 봉기에 대한 사료와 정보를 검열해 폐기했다. 바르샤바 봉기가 나치 독일이 아닌, 소련군을 겨냥한 반란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바르샤바 봉기가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폴란드에 민주 정권이 들어선 1989년 이후였다. 독일 매체들은 “바르샤바 봉기는 강대국 사이에 끼어 고통받아온 폴란드의 비극적 역사 중 일부”라며 “2차 대전 이후 동유럽 국가들에 실질적 냉전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고 평했다.
[파리=정철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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