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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8 (일)

[젠더살롱] 왼손으로 쓴 페미니스트라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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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견고한 남성 중심 세계를 함께 두드릴까?
난 커서 해적이 될 거야. 너희는?
-말괄량이 삐삐

"아빠, 페미니스트가 뭐야?" 받침 없는 글자를 막 읽기 시작한 어린이-반려자가 책장에 꽂힌 내 책 '두 번째 페미니스트'(서한영교, 2019)를 꺼내 들며 내게 물었다. 페미니스트라… 으흠.

그 책

한국일보

책' 페니스 파시즘' 표지. 개마고원 제공


2001년 7월, 국어사전에서 '페미니스트'를 처음 찾아보던 그날, 그 책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서점에서 서서 읽다가 일격을 당한 듯, 입이 떡 벌어져, 닭갈비집 철판을 닦아 번 돈으로 산 그 책.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읽었던 그 책. 도무지 무슨 말인지 도통 그 뜻을 모두 헤아릴 수 없었지만, 책 속에 담긴 맹렬한 진실에 이끌려 밤새도록 읽게 했던 그 책. 낱말 하나하나 짚어가며 사전을 찾아 읽게 했던 그 책. 그 책에서 '페미니스트'라는 낱말을 처음 보았다. '페니스 파시즘'(권김현영 외, 2001)을 읽던 10대의 마지막 여름방학이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안쪽


페미니스트(명사): ① 여권신장 또는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 ② 여성을 숭배하는 사람 또는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 그러니까, 페미니스트는 ‘남자’였다. 그것도 여성을 ‘숭배’하며 여성에게 ‘친절’을 베푸는 남자. 농담 같았다. 그 책에 등장하는 ‘페미니스트’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지독한 모멸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남근 중심 사회에서 "분노를 격발시킬 만큼 지독한" 혐오와 "지독히 사악한 성폭력"을 고발하고 있는 페미니스트. "지독한 남성 지배의 사회" 속에서 "이 모든 불평등을 공기처럼 편안하고 당연하게 느끼는 바로 당신이 '성폭력의 공모자'다"라며 집게손가락을 펼쳐 성차별주의를 딱, 지목하고 있는 페미니스트와 달라도 너무 다른 뜻풀이였다. 책에서는 성폭력, 성차별이 장기 지속되는 지옥 속에서, 여기가 지옥임을 지독하게 드러내며 저항하는 사람들이 페미니스트, 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여성에게 친절한 남자가 페미니스트라니. 처음으로 국어사전 뜻풀이를 의심했다. 책에 나오는 남근주의, 남성지배, 남성우월주의, 강간문화 같은 낱말들은 부지런히 국어사전을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단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던 ‘표준국어’가 남성/들에 의해 승인된 '나라 말씀'일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던 순간, 섬뜩했다.

표준국어사전의 바깥쪽


말로만 듣던 페미니스트들을 만나게 된 건, 대학 총여학생회에서 활동하면서부터였다. 페미니스트 선배들 뒤를 쫓아다니며 '말씀'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으러 많이 다녔다. "기생, 식모, 미친개, 개잡년, 깡패 할매"로 불렸다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싸우는 이야기를 직접 들으며 ‘남근중심주의’가 어떤 것인지, 소름 돋아가며 알아갔다. "성폭력은 여성의 성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가부장 제도의 산물"이라고 이야기하는 성폭력상담소 페미니스트들의 싸움을 통해 '강간문화'가 어떤 것인지, 덜덜 떨어가며 알았다. "일상 속 성차별이 치마 속까지 지배하는 문화"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고발하며 싸우고 있는 지역여성회 페미니스트들을 통해 '남성지배'를 실감나게 알아갔다. 표준국어의 바깥, 저항의 현장에서 익힌 낱말들은 생동했다.

표준국어대사전 바깥에서, 저마다 다른 빛깔로 스스로 페미니스트를 정의하며, 저마다 고유한 질감으로 페미니스트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던 할머니, 선배, 누나들은 빛나고 멋있었다. 대담하면서 부드러웠고, 박력 넘치면서 유머러스했고, 냉철하면서 다정했고, 무모하고 아름다웠다. 나도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남성인 내가 스스로 붙일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성차별적 사회에서 특권적 지위를 앞으로도 계속해서 누릴 게 뻔한 '남성'이라는 사회적 신체를 가진 사람이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없다고 여겼다. 페미니스트, 그건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열망의 이름이었다.

첫 번째 페미니스트 선언


2016년,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 사건 이후. 친구들과 혐오 살인이냐 묻지마 범죄냐에 관한 대화를 나누다가, "너도 페미년이야?"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 말을 뱉는 속도감에 놀랐다. 그 어떤 부끄러움도 없이 단숨에 '페미년'이라고 돌진하는 말을 들었을 때,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구타하기 위해 쓰이는 이름, 괴롭히기 위해 쓰이는 이름, 추하고 모욕적인 이름으로 '페미'를 사용하고 있었다. 열망하던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을 이따위로 불리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주먹을 꽉 쥐고 대답했다. "그래, 나 페미년이다. 그래서 뭐?" 첫 번째 페미니스트 선언을 이렇게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페미라는 이름에 전속력으로 여성 혐오가 쌓여갔다. 머리가 쇼트커트라는 이유로 페미.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페미. 82년생 김지영을 읽는다고 페미. 까칠하게 말한다고 페미. 꾸미지 않는다고 페미. 혐오로 미어터질 지경에 도달한 페미는 정신병자, 극단주의자, 더러움, 역겨움, 오물, 전염병 같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낙인과 혐오는 침묵하기를, 수치심을 느끼기를, 고립되기를 노리며 온갖 모욕어와 혐오 발언들을 실시간으로 생산했다.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을 걸려면, 그 이름에 찍혀있는 페미년 낙인도 함께 감당해야 했다. 나는 수십 년간 온갖 모욕과 혐오에도 물러서지 않고, 낙인찍힌 이름을 감당하고 있던 페미니스트 동료들, 누나들, 선배들, 할머니들의 자긍심을 꼭 쥐었다.

페미니스트 자긍심

한국일보

책 '두 번째 페미니스트' 표지. 서한영교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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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출간을 준비하던 책 제목으로 '두 번째 페미니스트'가 정해지고, 몇 가지 표지 디자인이 나와서 가족들과 가까운 지인들에게 돌려, 선호도를 물었을 때. 돌아온 응답 중에 몇몇은 표지 디자인이 아니라 제목이 '좀 그렇다'라고 했다.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이 들어간 제목이 좀 그렇다고 했다. 책이 나오면 열심히 팔아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친구도 제목이 '좀 그렇다'라고 했다. 겁나서 이 책을 어떻게 밖에 들고 다니냐며 제목이 '좀 그렇다'라고 했다. 다른 한 친구는 땅이라도 무너진 듯 "어떻게 내 친구가 페미라니!"라며 주저앉기도 했다. 긴 메시지를 보냈다.

'친구들아. 나는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을 들을 때면 힘이 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당신을, 너희들을 오롯이 긍정할 수 있게 해. 페미니스트로 있을 때, 나는 강해지고, 부드러워지며, 맹렬해지고, 온화해지고, 여성적이면서, 남성적이고, 고정된 보편/정상/일반/평균에 정박하지 않게 해. 내면화된 젠더 혐오에 저항하게 하는 이름, 일상을 재구축할 수 있게 하는 이름, 빛나는 느낌과 해방의 향기가 나는 이름. 이 이름을 통해 구성되는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 어떤 경이로움과 우정으로 가득 차 있는지, 페미니즘이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해방의 무기'로 어떻게 무장되어 있는지를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으로 말해보고 싶었어. 페미니스트, 이 이름에 대한 자긍심을 빼앗기지 않을 작정이야. 책 한 번씩 읽어봐 줘.'

무모하고 아름답기를

한국일보

서한영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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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페미니스트가 뭐야?"라는 어린이-반려자의 질문에 나는 답하지 못한 채, '두 번째 페미니스트' 표지를 한 장 넘겼다. 빈 페이지에 출간기념으로 삐뚤삐뚤 왼손으로 써둔 글씨가 나왔다. 어쩌면, 그래, 어쩌면,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은 익숙하지 않은 왼손으로 써 내려갈 수밖에 없는 이름은 아닐까. 남성 중심 사회에서 능숙하게 익혀온 젠더 규범을 따르는 게 아니라 왼손으로 삐뚤삐뚤하고, 삐딱하고, 삐걱거리며 쓸 수밖에 없는 이름. 가끔 발을 삐기도 하고, 삐죽 웃기도 하며 나아가는 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늘 무모한 말괄량이 삐삐는 주근깨 가득한 얼굴로 "그래 난 예쁘지 않아. 못생겼어. 근데 그래서 뭐!"라고 자신을 평가하던 친구들을 향해 "그래서 뭐!"라고 아름답게 응수하곤 했다. 예쁘지 않게 삐뚤삐뚤 왼손으로 쓴 못생긴 글씨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한 번 읽어볼까? 하고 어린이-반려자에게 제안했다. "무모하고 아르음다압기르을" 오늘의 대답은 이거야. 내일은 또 다를 수도 있어. 페미니스트가 뭐야? 라는 질문에 백만 가지가 넘는 응답이 있거든.
"내 걱정은 마세요. 난 언제나 잘해 나갈 테니까."
-말괄량이 삐삐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와 서한영교 작가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서한영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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