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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 (목)

이슈 미술의 세계

'아침이슬' 보다 맑았던 영원한 청년…'학전' 이끈 김민기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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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노래는 울분으로 가득한 이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연료가 됐다. 본인은 스스로를 ‘뒷것’이라 부르며 드러남을 원치 않았지만, 노래는 제 운명대로 세상의 슬픔과 공명하며 널리 퍼져나갔다.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아침이슬’)고 노래했던 음유시인, 싱어송라이터이자 소극장 학전 대표였던 김민기가 위암 투병 끝에 21일 별세했다. 7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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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열린 학전 마지막 콘서트. 사진 학전



김민기의 조카이자 학전 총무팀장인 김성민 씨는 22일 서울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댁에서 요양 중이던 선생님(김민기)의 건강이 19일부터 안 좋아졌고 20일 오전 응급실을 찾았다”며 “병원에 갔을 때부터 상태가 좋지 않아 다음 날 오후 8시 26분에 돌아가셨다”고 밝혔다. 이어 “갑작스럽게 떠나셨지만 3∼4개월 전부터 가족 등 가까운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셨다”며 “학전과 관련해선 ‘지금 끝내는 게 맞다. 나는 할 만큼 다 했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아침이슬’ ‘상록수’ 등 숱한 명곡을 남긴 고인은 1991년 대학로에 학전을 설립하고 수많은 신인 배우와 작가들에게 기회의 장을 제공하는 등 문화예술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가수 고(故) 김광석 콘서트, ‘유재하 가요제’가 이곳에서 열렸고, 배우 설경구·김윤석·황정민·조승우·장현성·이정은과 재즈 뮤지션 나윤선 등이 고인이 제작한 뮤지컬 ‘지하철 1호선’ 무대를 거쳐갔다.



“내 노래가 사람들 위로했다면 영광”



김민기는 1951년 전라북도 익산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한국전쟁 후엔 서울로 이주해 재동초등학교, 경기중·고등학교를 다녔다. 학창시절엔 기타를 치고 그림을 그리며 음악과 미술에 몰두했다. 19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한 후에도 음악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동창생인 이노디자인 김영세 대표와 듀엣 ‘도비두’를 결성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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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학전 신년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고 김민기. 사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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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로서 고인의 삶은 외압에 맞선 저항의 역사였다. 1970년, 가수 양희은을 만나면서 시대를 바꾼 노래 ‘아침이슬’이 탄생한다. 1971년 발매한 본인 앨범에도 수록한 ‘아침이슬’은 아름다운 노랫말로 ‘건전가요 서울시문화상’을 받았지만, 1975년 금지곡으로 묶인 아픔이 담긴 노래다. 김민기는 반지하 창고의 개인 작업실에서 ‘나의 시련’이란 가사가 떠올라 이 노래를 쓰게 됐다고 한다.

‘아침이슬’을 비롯해 ‘꽃 피우는 아이’, ‘늙은 군인의 노래’, ‘상록수’ 등 고인이 쓴 노래 대부분은 ‘운동권 가요’로 불리며 금지곡으로 지정됐다가, 1987년 6·10 민주항쟁 이후 해금됐다. 금지곡 시절엔 불온한 노래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경찰, 검찰, 보안사, 안기부 등에 연행돼 숱한 고초를 겪었다. 그는 1990년 음반 ‘겨레의 노래’를 제작한 뒤 이를 기념해 전국 순회공연을 하면서 ‘아침이슬’을 불렀다. 이 노래를 공개된 장소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부르기까지 20년이 걸린 셈이다.

1984년에는 민중가요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을 결성해 프로젝트 음반을 발매했다. ‘노찾사’ 출신의 포크 가수 권진원은 “김민기 선생님의 노래엔 어떤 고결함과 숭고함이 느껴진다. 신기하게도 선생님이 쓴 노래엔 사랑이란 가사가 없다. 노랫말엔 없지만 그 누구보다도 세상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시대의 상징이 되는 것을 경계했다. 1998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선 “운동을 염두하고 만든 노래는 하나도 없다. 심정적 동조는 했더라도 집단적 운동은 내성적인 나에겐 맞지 않는다”면서 “수용자들이 시대 상황에 따라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내 노래가 그들에게 공명돼 그들을 위로했다면 다만 영광일 뿐”이라고 밝혔다.



“우리가 함께 한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



그의 예술세계를 지탱한 또 하나의 뿌리는 무대였다. 고인은 1978년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시작으로 1983년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등을 연출했고, 1991년 소극장 학전을 대학로에 개관했다.

학전이 1994년 초연한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한국 뮤지컬 역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2023년까지 8000회 이상 공연을 올리며 70만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고인은 독일 원작을 한국 정서에 맞게 번안한 이 작품으로 독일 문화훈장인 ‘괴테 메달’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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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의 산실이었던 학전은 지난 3월 만성적인 재정난과 김민기의 건강 문제 등으로 33년 만에 폐업했다. 4월 방송된 SBS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에선 암 투병 중에도 학전 폐업 전 마지막 공연을 관람하러 온 김민기의 모습이 담겼다. 영상에서 그는 “우리가 함께 했던 모든 순간들이 소중했다”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 끼친 예술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든 수많은 명작을 만들었지만 그는 스스로를 배우와 가수 뒤에 선 ‘뒷것’이라 칭했다. 학전 폐업 때 1억원 이상을 기부한 이수만 전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는 평소 주변인들에게 김민기를 “조용하며 나서지 않고, 나서야 할 때는 묵묵히 책임만 감수하는 순수하고 맑은 시인”이라고 말해왔다. 고인의 서울대 후배이기도 한 이수만은 동아리 활동을 함께하는 등 고인과 오래 전부터 인연이 있었다.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는 “김민기 이전에는 청춘의 사실적 의식을 대변하는 노래가 없었다. 1971년 낸 그의 유일한 앨범이 지금까지도 엄청난 의미를 갖는 이유는 포크 문화의 개화와 융성을 주도한 사실상 싱어송라이터의 시작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넉넉한 목소리에 깊은 음색이 있는 뛰어난 보컬리스트인데 그의 성향과 시대적인 여러 이유로 대중이 그의 목소리를 많이 듣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고 덧붙였다.

최영균 대중문화평론가는 고인에 대해 “대중문화예술업 종사자의 처우까지도 신경 썼던, 문화예술 제작의 기초를 만든 사람”이라며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예술가이자 위인”이라고 말했다. 고인의 음악인생을 종합한 연구서 『김민기』를 낸 성공회대 김창남 교수는 그에 대해 “시대의 영웅 혹은 신화가 아니라, 우리 곁에서 미래를 만들어갔던 사람”이라고 평했다.

빈소는 서울대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미영 씨와 2남이 있다. 24일 오전 8시 발인.

이영희·황지영 기자 hwang.jee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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