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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0 (금)

만리장성의 시작에서 '뜻밖의 와인'…운명 가른 '난공불락의 요새'가 있었으니 [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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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허베이 산하이관 편 (글 : 모종혁 중국문화평론가·재중 중국 전문 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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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에서 성루가 유일하게 남아있는 동문에 걸려있는 '천하제일관' 현판

1644년 음력 4월 22일 청나라 대군은 지금의 산해관(山海關, 중국명 '산하이관') 앞에 도착하였다. 산해관을 지키던 명나라의 총병관 오삼계는 성문을 열고 청군을 맞이하였다.

당시 산해관에 주둔하였던 명군은 5만 명이었다. 비록 입관하는 청군 14만 명에는 훨씬 못 미쳤지만, 산해관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만약 오삼계가 병사들과 함께 결사항전했다면, 청군은 결코 산해관을 점령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삼계가 청에 투항한 이유는 한 여인 때문이었는데, 베이징에 두고 왔던 애첩 진원원이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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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성의 끝부분이자, 만리장성의 동쪽 시작점이었던 입해석성

그해 초 대순(大順)을 건국한 이자성이 이끈 농민군은 베이징으로 물밀듯이 쳐들어갔다. 베이징에는 오삼계의 가족이 남아있었다. 음력 3월 농민군은 베이징에 입성하였고, 황제인 숭정제는 자살하였다.

수도를 장악한 이자성은 오삼계에게 투항을 권하였다. 오삼계가 고민하던 중 아버지인 오양은 고문당하였고, 이자성의 부장 유종원이 진원원을 강탈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따라서 오삼계는 크게 분노해서 마음을 돌렸다. 이에 청군 총사령관인 섭정왕 도르곤에게 밀지를 보내서 "투항하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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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난(雲南) 성 쿤밍(昆明) 시의 태화궁 금전에 있는 오삼계의 동상

도르곤은 오삼계의 의지와 전후 상황을 파악하고 대군을 이끌고 산해관에 들어갔다. 이 사건을 오늘날 중국에서는 '청군입관(清兵入關)'이라고 부르는데, 청나라가 대륙을 차지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평가한다.

실제로 청군은 산해관에 들어온 뒤 한 달여 만인 음력 6월 5일에 베이징을 함락시켰다. 그렇다면 산해관은 어떤 이유로 그토록 중요하였고 난공불락의 성이 되었을까?

산해관은 6세기 수나라 때 처음 세워졌다. 당대에는 우리와 인연을 맺게 되는데,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한 전초기지 격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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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에 산해관을 중축하여 오늘날처럼 만들었던 서달의 석상

그래서 송대까지 '유관(渝關)', '임유관(臨渝關)'으로 불리며 중요한 군사 요충지로 꼽히었다. 명대 들어서는 그 중요성이 한층 격상되었다.

이에 따라 1381년 주원장은 개국공신인 서달에게 명령해 성문과 성벽을 중축하였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때 옌산(燕山)과 보하이(渤海) 사이에 있는 성이라고 해서 지금의 지명이 붙여졌다.

산해관의 성곽 총길이는 4,727m이고, 높이는 14m, 폭은 7m이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4개로 세웠다. 대부분 오늘날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데, 성루는 동문만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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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성벽 앞에 파여진 해자

동문의 성루에는 산해관을 상징하는 '천하제일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모든 성문은 옹성 구조로 지어져서 둘레 길이가 318m에 달한다. 또한 성벽 앞에는 해자를 파서 적의 침입을 막았다.

산해관은 다시 주변의 산과 바다까지 성벽을 이어서 건설하였다. 해안가까지 뻗은 성벽은 영해(寧海·닝하이)성과 맞닿았다.

영해성은 산해관의 부속 성으로, 해안가로 넘어오는 적군을 막기 위해서 지었다. 16세기에는 성벽을 바다 물속까지 쌓았는데, 이것을 '입해(入海)석성' 혹은 '라오룽터우(老龍頭)'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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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성 내에 있는 수사 군사들의 병영

라오룽터우는 마치 용이 머리를 앞세워 바다로 나가는 모습 같다고 하여 현지 주민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흥미로운 점은 영해성이 해안 방어를 위한 해군기지로도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초기 해군의 규모는 작았으나, 명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수사(水師)를 따로 설치하였고 100여 척의 전선을 배치하였다.

이 시기에 활약하였던 장군이 척계광이다. 척계광은 군사들의 훈련을 강화하였고 군율을 엄격히 해서 정예병을 키워냈었다. 이를 이론적으로 정립한 병법서가 《연병실기(練兵實紀)》와 《기효신서(紀效新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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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성의 사당에 모셔져 있는 척계광의 찰흙상

이 중 《기효신서》는 척계광이 남부 해안가에 침략한 왜구에게 적용하였던 전술과 무예를 기본으로 한다. 실전에서 증명된 이론을 바탕으로 척계광은 명대 중국을 괴롭혔던 왜구를 토벌하였다.

《기효신서》는 임진왜란 시기 조선에도 전래하여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런 척계광이 1567년에 총병관이 되었고, 산해관과 그 일대를 다스리면서 요새화시켰다.

입해석성을 지었던 이도 척계광이다. 또한 입해석성부터 옌산까지 연결되는 만리장성을 쌓았다. 오늘날 산해관 구간은 '각산(角山·자오산)장성'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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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성 내에 복원한 팔괘진(八卦陣) 훈련장

이렇듯 산해관은 명나라에서 가장 완벽한 군사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척계광과 함께 산해관과 뗄 수 없는 인물은 원숭환이다.

원숭환은 1619년 과거에 급제해서 처음에는 문관으로 봉직하였다. 하지만 평소 병법을 논하길 좋아했기에 병부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전직한 지 얼마 안 되어 혼자 변방으로 가서 현지를 살피고 돌아왔다.

그리고 조정 대신들에게 "충분한 병사, 말, 양식, 군비만 있으면 혼자 산해관을 지킬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다. 대신들은 원숭환의 재능을 간파하고 산해관의 방위 임무를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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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환이 영원성을 쌓아 주민들을 이주시킨 이야기를 형상화한 동상

1624년 원숭환은 부임해서는 산해관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 200리 밖에 외성인 영원(寧遠·닝위안)성을 짓자고 조정에 주청하였다.

처음에는 상소가 거절되었으나 대학사 손승종이 지지하면서 실현되었다. 이런 노력은 곧 결실을 맺었다. 1626년 청의 누루하치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으나, 원숭환은 영원성에서 항전해서 승리하였다.

특히 산해관에 있던 포르투갈의 대포인 홍이포를 옮겨 운용해서 청의 기병대를 격멸시켰다. 이때의 참패에 충격받아 누루하치는 크게 상심하여 병을 얻었고 반년 만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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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에 세워진 원숭환의 동상

그 뒤 즉위한 홍타이지가 이듬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공격해왔다. 원숭환의 부장인 조솔교가 지키던 금주(錦州·진저우)성을 먼저 공략했으나 실패하였다. 홍타이지가 군대를 돌려 영원성에 갔으나 역시 패배하였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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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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