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오후 서울남부지법 형사14단독 홍윤하 판사가 피고인 최모(46)씨에게 물었다. 최씨는 같은 농아인(청각·언어 기능에 모두 장애가 있는 사람)을 상대로 10억 원대 곗돈을 가로챈 사기 혐의로 지난달 13일 구속기소돼 이날 첫 공판에 출석했다. 최씨는 재판부가 지정한 수어 통역사를 통해서 “완전히 듣지 못한다”고 답했다. 최씨 변호인은 “단순히 계모임 대표 역할을 맡았을 뿐 사기를 치겠다는 의도가 없었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순간 방청석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방청석을 가득 채운 농아인 27명이 저마다 격렬하게 수어로 항의했다. 최씨는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방청석을 향해 고개 숙이고 퇴장했다. 이를 조롱으로 받아들인 한 농아인이 자리를 박차고 주먹감자를 내지르다가 법정 경위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2020년 2~5월 무렵 농아인만 가입할 수 있는 데프계를 조직해 곗돈 사기를 벌인 혐의로 구속기소된 최모(46)씨의 재판이 지난 9일 서울남부지법에서 열렸다. 사진은 최씨가 2020년경 서울의 한 사무실에서 농아인들로부터 5만원권 곗돈을 수령하는 모습. 독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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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의 범행은 4년 전으로 거슬러간다. 사건을 수사한 서울남부지검 형사4부(부장 남수연)에 따르면, 최씨는 강남 선릉 일대에서 활동하던 일명 ‘선릉계’에서 곗돈 사기 수법을 익혔다. 그는 2020년 2월 무렵 농아인만 가입할 수 있는 이른바 ‘Deaf계(데프계)’를 조직했다. Deaf는 영어로 농아인이란 뜻이다.
최씨는 가입금의 3배를 곗돈으로 지급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계원을 모았다. 초기 가입금은 5만원 수준이었다. 실제 약속대로 가입금의 3배인 15만원을 계원에게 준 적도 있다고 한다. 큰돈을 만질 수 있다는 소문이 농아인 사이에서 돌면서 가입자가 늘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피해자로부터 받은 돈을 돌려막기 한 것에 불과했다. 최씨는 이후 가입금을 1000만원으로 올리고 ‘천계’로 계 이름을 바꿨다. 이렇게 같은 해 5월까지 농아인 172명에게서 10억885만원을 가로챈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9일 오전 서울남부지법에서 데프계 사기 사건의 농아인 피해자들이 모여 사건 설명을 듣고 있다. 이날 법원을 찾은 피해자의 친동생 정유진(40)씨는 "나잇대가 있는 일부 농아인은 교육 수준이 높지 않아 사건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독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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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최씨가 결속력이 강한 농인(聾人) 사회의 특성을 악용했다고 보고 있다. 최씨가 돈을 불릴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설명하지 않았어도 피해자들은 그가 같은 농인이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피해자 A씨(50대)는 “(최씨가) 같은 농인이라 믿고 돈을 맡겼는데 사기를 당해서 배신감이 더 크다”며 “낮에는 택배 일을 하고 밤에는 호떡 장사를 하면서 번 돈”이라며 씁쓸해 했다.
최씨의 유창한 수어 ‘언변’도 피해자들이 그를 믿을 수밖에 없게 된 이유 중 하나다. 농사회에서 수어 구사 능력은 신뢰의 척도로 작용한다고 한다. 40대 피해자 정모씨도 그런 경우다. 정씨는 자동차부품회사 퇴직금 2400만원을 데프계에 넣었다가 원금을 몽땅 날렸다. 상심에 빠진 정씨는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대퇴부 무혈성 괴사증이 발병해서 인공관절 수술까지 받았다고 한다. 정씨의 동생 정유진(40)씨는 “말에 힘이 있듯이 수어에도 힘이 있다”며 “농사회에서 전도사로 알려진 최씨의 수어는 마치 교주와도 같은 카리스마가 있었다”고 했다.
서울남부지검 형사4부(남수연 부장검사)는 농아인 172명으로부터 약 10억885만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는 최모(46)씨는 구속기소했다고 지난달 13일 밝혔다. 남부지검 관계자는 "농아인이 피고인과 피해자라서 수사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수어통역인이 동석한 수십차례의 조사 끝에 사건의 전모를 밝힐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진은 금융범죄중점검찰청인 남부지검 본관 입구.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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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범행에 공범이 있다는 의혹도 있다. 지난달 21일 피해자 15명은 서울 구로경찰서를 찾아 최씨에게 공범 2명이 있다고 주장하며 고소장을 냈다. 70대 피해자 B씨는 “최씨를 소개해주고 곗돈을 모금·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중간 관리책이 있다”고 했다. 실제 최씨의 변호인은 9일 열린 재판에서 “피고인 혼자 계를 조직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운영했다”고 말했다.
최씨를 법정에 세우기까지 4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 이유는 피고인과 피해자가 모두 농아인이라는 특수성 때문이다. 검·경은 수화 통역인을 수십차례 조사에 참여시켜 수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검찰 관계자는 “피조사자의 진술을 통역을 거쳐 전달받는 등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검·경이 협력해 피고인 혐의를 규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최씨에 대한 감형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형법 11조는 “듣거나 말하는 데 모두 장애가 있는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는 형을 감경한다”고 규정한다. 서울남부지법 판사가 검사의 공소사실 요지 낭독에 앞서 최씨가 듣고 말하는 데 장애가 있는지 먼저 확인한 이유다.
농아인 감경 조항은 1953년 형법 제정 당시부터 존재했다. 과거 의사결정에 필요한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했던 농아인을 배려하는 취지로 마련됐다. 그러나 구체적 사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감형을 하는 법이 야기할 수 있는 처벌 공백도 크다는 지적이 많다.
대법원 판결문 열람 시스템을 조회해보니 최근 10년간 농아인 감경이 적용된 형사 사건은 최소 941건으로 나타났다. 폭력, 사기부터 성범죄까지 다양한 죄목에서 농아인 감경이 적용됐다. 지난 2022년 8월 수원지법 안산지원 형사1부(부장 김영민)는 아동·청소년성보호법 위반(성매수·성착취물 제작 및 배포) 혐의로 기소된 농아인 A씨에 대해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지난 2018년 1월 창원지법 앞에 모인 농아인들이 농아인 사기단 '행복팀'에 대한 선고 결과 발표를 듣고 있다. 행복팀은 같은 농아인을 상대로 100억원대 사기 행각을 벌였지만, 농아인 감경 규정 적용이 불가피해 솜방망이 처벌 논란이 일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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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농아인 150여명을 상대로 100억원대 사기 행각을 벌인 일명 ‘행복팀’ 사건은 농아인 감경 조항 존폐 논란을 촉발했다. 2017년 당시 총책 김모(51)씨에게 검찰이 적용한 사기죄의 최고 형량은 10년. 다만 농아인 감경을 감안해 검찰은 김씨에게 징역 7년6개월을 구형했다.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자 법원은 이례적으로 선고를 두 차례 미뤘다. 그 사이 검찰은 높은 형량을 구형할 수 있는 특경법상 상습사기로 공소장을 변경했다. 결국 2018년 1월 열린 선고 공판에서 김씨는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전문가들은 시대 변화에 맞춰 형법의 농아인 감경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와 달리 특수교육 수준이 향상된 사정 등을 고려하면 농아인이란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인 감형은 타당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20대 국회에서 법관 재량으로 감형 여부를 판단하도록 하는 형법 일부개정안이 제출됐지만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을 지낸 장영재 변호사는 “사기 범죄를 저지를 정도의 농아인은 비장애인보다도 똑똑한 사람이 많다”며 “농아인 감경 조항은 삭제하되 심신장애 감형을 규정한 10조에 따라 판사 재량으로 감형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영근 기자 lee.youngk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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