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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6 (월)

'두 남매 아빠'라던 영업맨…98년생 아들뻘에 당한 50대 가장[코인사기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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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코인사기공화국-그들은 치밀했다>

③-⑵회생법원까지 갔다…가족 관계도 막막(피해자들 단독 인터뷰)

15년만에 현장직으로 내려갔다

신용점수 990점 아빠의 몰락

소송 이겨도 막막…후회한다

"전화 통화를 할 때 자기도 어엿한 '아빠'라면서 혜빈이·정민이 등 제 자식 이름 걸고 설명해 드린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나중에 잡고 보니까 이놈이 98년생이더군요."

지난 2일 저녁 서울시 강서구 모처에서 만난 50대 정윤호씨(가명)는 본인 담당 영업사원 임소원씨(가명) 신분증 사본을 보여주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제조업 현장에서만 30년 이상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가상자산(코인) 투자 사기를 당한 후 15년가량 근무했던 관리직을 떠나 최근 현장직으로 자진해 내려왔다. 매달 100만원이 넘는 이자에 한 푼이 아쉬웠던 터. 2차례 수술받은 허리로는 무리인 걸 알았지만, 인천 본가의 아내와 고등학생 아들을 생각하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검은색 백팩에서 그동안 모아온 소송 서류와 증거 자료들을 꺼내 보여줬다. A4 용지 기준 얇은 책 한권 분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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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NDX 코인 사기 사건 관련 피해자들이 지난 2일 저녁 서울 강서구에서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모습. 사진=차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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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고에 다툼 잦아져…아들 성인 되면 이혼 생각
정씨는 "집사람과 좋은 대화가 없는데 지금 생활비 문제로 많이 싸운다"며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이 성인이 되면 이혼을 하려고 하는데, 지금 아들도 저랑 대화를 아예 안 한다"고 토로했다. 정씨는 또 "이자만 130만원씩 내고 있는데 내년부터는 원금까지 내야 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씨의 투자 금액은 대출 포함 2억3000여만원이다.

정씨가 휘말린 코인 사기 업체는 유사투자자문 업체로 여의도 증권가에서 유명했던 L투자그룹이다. A 대표가 이끄는 L그룹은 주식 리딩에 주력했으나 코인 투자 붐에 편승해 2021년 말 코인 사기로 사업 방향을 전환했다. 이처럼 L그룹이 7여개 판매법인을 통해 영업한 코인은 SRT·RNDX·HTT·NFUP·VKT 등 20종이 넘는다. 영업사원들은 주식 리딩방에서 확보했던 고객 데이터베이스(DB)를 무기로 가명·대포폰을 업고 피해자들을 물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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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장에 명시된 RNDX 코인 사기 사건 관련 피해자 측 증빙 자료를 재가공한 것. 왼쪽부터 범행 일시, 장소, 피해자, 입금 계좌주, 피해금액, 입금은행, 입금계좌, 수신 계좌주, 수신은행,수신계좌번호, 판매법인. 사진제공=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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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도, 판매법인도 제각각이지만 사기 수법은 비슷하다. 본사에서 내려보낸 영업 대본 초안 덕분이다. 일명 '영업맨'들은 주식 리딩에 따른 손실을 보전한다며 코인 구매를 권유하고, 코인에서 손실이 난 후 '팀장' '실장' 등 더 높은 직책의 영업사원을 붙여 다른 코인을 또 팔았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RNDX건 관련 피해 신고자 수만 377명, 피해액은 104억원에 달한다. '프라이빗 세일(비공개로 진행하는 할인 판매)'과 '락업(보호예수)'이 합쳐진 신종 사기 형태로, 하루에도 피해자들과 10통씩 통화하던 영업맨들은 투자자들이 사기인 걸 알아차릴 때쯤 대포폰을 해지하고 잠적했다.

평범한 가장의 몰락…회생법원까지 갔다
그나마 정씨는 윤재형씨(가명)에 비하면 상황이 나은 편이다. 60대 윤씨는 피해자들 사이에서 '윤 사장'으로 불렸다. 단정하게 빗은 머리, 소라색 와이셔츠에 잘 다려진 재킷까지 갖춰 입은 그는 겉보기엔 전혀 사기 피해자로 보이지 않았다. 개인회생을 마친 사람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인천 연수구 살던 집 바로 앞에 청량산이 있었어요. 제가 기독교인이라 산 기도, 새벽 기도하러 가던 곳인데 갚을 수 없는 빚이라 생각하니 내 죽을 자리가 거기 아닌가 그랬지요…."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윤씨 역시 2022년 정년퇴직을 앞두고 L그룹의 월회비 1000만원짜리 주식 리딩방에 가입했다가 엮였다. 투자 손실만 거듭할 무렵 업체에선 보상 명목으로 코인 리딩을 제시했다. 이미 주식에 수천만원을 쓴 터라 보상 손실을 해주겠다는 얘기에 이성이 마비됐다. 총 8억. 퇴직금 1억8000만원은 물론 신용·아파트 담보 대출까지 끌어다 쓴 돈은 수개월 만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990점 높은 신용점수 덕에 '핀다' 등 플랫폼을 통한 비대면 대출도 손쉬웠다. 업체 측에선 더 이상 정상 대출이 불가하자 연 15% 이율 사채까지 직접 소개해줬다.

그는 "개인회생 제도가 있어서 여태 살아있는 것"이라며 "차라리 신용점수가 낮았으면 좋았을걸….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걸 아는데 그때는 이미 너무 깊이 들어가서 발을 뺄 수가 없었다"고 담담히 얘기를 이어나갔다.

매달 불어나는 이자와 11개 기관의 독촉 전화를 감당하지 못해 아내에게 먼저 이 사실을 고백하자 당장 이혼 얘기부터 나왔다. 윤씨는 "처음엔 워크아웃을 신청했지만, 이것도 이자 연체가 계속돼서 다시 서울회생법원에 가서 개인회생을 신청했다"며 "변호사 말이 주식·코인 사기가 너무 늘어서 서울회생법원에서 1년에 3만명이 회생을 신청한다고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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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회생법원의 '2023년도 개인파산사건 통계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파탄 원인 중 '투자(주식 등) 실패 또는 사기 피해' 비율은 2021년 2.07%에서 2022년 11.29%로 급증한 후 2023년도에도 10.95%로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2023년 기준 사업 부도 등 주요 파탄 원인 중 5번째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피해자 대표 격으로 몸소 뛰고 있는 50대 여성인 김주현씨(가명)도 상황은 비슷하다. 그는 금융 지식을 필요로 하는 직업 보험설계사였음에도 비슷한 수법에 당했다. 2020년 잠깐 가입했다가 해지한 VIP 주식 리딩 서비스에서부터 조직적으로 설계된 사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했다.

"남편한테는 5000만원만 당했다고 줄여서 말했는데 실제는 아무래도 훨씬 크죠. 지금은 사기당한 정도만 알고 있는데, 남편도 자식도 아무도 다 이해 못 하고 절 무시해요. 그걸 왜 당했냐고 하니까요." 인터뷰 내내 시종일관 명랑한 웃음을 짓던 김씨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다.

황혼 취업 전선 뛰어들어
RNDX건 외에도 코인 사기에 당해 황혼 취업에 나선 이도 많다. 전직 고교 교사인 60대 박인구씨 역시 서울시 종로구 일대의 한 건물 관리인으로 근무 중이다. 주차도 해주고 건물 관리도 한다. 생활력 강한 아내도 돈벌이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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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경기도 안양시 인근에서 만난 코인 사기 피해자 박인구씨가 고소장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 사진=차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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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는 이런 사기집단이 일벌백계가 됐으면 좋겠다며 먼저 실명 보도를 요청했다. 그는 2021년 6월쯤 정년 퇴임을 앞두고 경기도 안양시의 한 고등학교에서 지리 과목을 가르쳤다. 은퇴 직전 지인의 부탁에 1년6개월가량을 기간제 선생님으로 일했다. 외부 평판이 나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반평생 교육자로 살았던 그는 야간 근무를 하는 건물 관리인으로 근무 중이다. 고된 일은 아니지만, 꼭 필요한 생계 수단이다. 아내는 "잃어버린 돈 치자"고 했지만, 박씨는 그럴 수 없었다. 직접 법률사무소와 '피해 구제 도우미' 카페 도움을 받아 민사소송에 적극 뛰어들었다.

신종 코인 사기 수법이 그렇듯, 그 역시 시작은 주식 리딩방이었다. 2022년 하반기 주식 리딩을 해주던 D 회사에서 보상 차원이라며 크립토끼·아이템버스·헐비 등을 소개했다. 이미 상장되거나 상장을 앞둔 코인들로 모두 락업이 걸려 있었다. 초반 승승장구하면서 추가 자금을 밀어 넣었고 그렇게 6~7개월 사이 투자한 금액은 총 8000만원까지 불어났다. 기간제 교사 14호봉(4000만원) 2년 치 연봉이었다. 락업 해제일만 기다리던 그는 2022년 9월 크립토끼 락업 해제일에 큰 충격을 받았다. 둘째 아들의 도움을 받아 매도 주문을 냈지만, 체결이 안 된 것. 그 사이 코인 가격은 99% 급락했다. 당시 4000만원어치였던 코인은 이제 100만원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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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구씨의 코인 사기 사건 관련 고소장들. 사진제공=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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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528만원 주식 리딩비라도 받아내려고 D 회사 김경희 대표(가명)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냈는데 1심 패소하고 2심에서 원고 승소를 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돈이 없다고 해서 형사 고소를 하게 됐습니다. 합의금 명목으로라도 받아보려고 한 거죠. 근데 지금은 다 후회합니다. 처음엔 이자 빼고 원금이라도 주겠다던 피고 측 변호사가 지금 이런 업체들이 너무 많이 걸려 있어서 합의가 어렵다네요."

코인 사기를 친 영업사원 정 태훈씨(가명)를 대상으로 진행한 형사고소도 비슷한 상황이다. 해당 건은 작년 4월 영등포경찰서를 거쳐 지난달 26일 비슷한 83건이 병합 결정돼 서울남부지방검찰청으로 송치됐다. 피의자 수만 66명. 실세였다고 생각한 김 대표 역시 '바지사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 씨의 시간은 또 하염없이 흐를 전망이다.

"그냥 2022년 말에 경찰에 신고하고 나서 정태훈이가 2000만원에 합의하자 할 때 할 걸 그랬어요. 소송 이겨서 후련한 거 빼고는 실제로 얻은 게 하나 없어요. 이런 일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돼서 일반 서민들이 너무 억울한 일 당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한편, 아시아경제는 L그룹의 A 대표를 대변하는 법무법인 로집사 등에 피고 측 입장을 묻기 위해 여러 차례 연락을 취했으나 답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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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받습니다>
'가상자산 투자사기'에 대해 심층 취재 보도할 예정입니다. 코인 범죄 근절을 위한 종합 대응 방안 마련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제보(lsa@asiae.co.kr) 부탁드립니다. 끝까지 취재해 보도하겠습니다.

<특별취재팀> ▲팀장 이선애 부장 △김민영 차민영 김대현 황윤주 기자

차민영 기자 bloomi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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