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수익률보다 노후 생활비를 잃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상품 선택의 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또 제도 시행 당시 금리가 높았던 점도 원금 보장 상품 쏠림을 부추겼다. 전문가들은 ‘퇴직연금 수익성 제고’라는 제도 취지에 맞춰 디폴트옵션을 미국·영국 등 금융 선진국처럼 실적 배당형 상품 중심으로 손질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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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직연금 수익률 개선 목적인데… 90%가 ‘원금 보장’ 상품
8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2022년 7월 법 마련 이후 1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작년 7월 12일부터 전면 시행된 디폴트옵션은 이달 12일부로 1주년을 맞이한다. 디폴트옵션은 확정기여(DC)형이나 개인형 퇴직연금(IRP) 가입자가 적립금 운용 방법을 지시하지 않으면 퇴직연금 사업자가 사전에 약속한 방식대로 자동 운용하는 제도다. 올해 1분기 말 기준 디폴트옵션 가입자는 527만명이다. 지난해 말 479만명에서 48만명 늘었다.
문제는 디폴트옵션 가입자의 90%(422만명)가 원리금 보장 상품 100%인 ‘초저위험’ 등급에 몰려있다는 점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디폴트옵션 위험 등급은 ‘초저위험-저위험-중위험-고위험’ 등 4단계로 분류된다.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는 실적 배당형 상품은 2단계(저위험)부터 담을 수 있는데, 위험 부담을 조금이라도 감수하려는 가입자가 10명 중 1명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한 대형 증권사의 퇴직연금 부문 고위 관계자는 “거의 모든 직장인이 은퇴하고 죽을 때까지 생활비로 쓸 노후 자금을 절대로 잃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당연히 사전 지정을 할 때도 은행 예금, 보험사 이율보증보험계약(GIC) 등의 원리금 보장 상품을 선택할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팬데믹(감염병 대유행) 이후 이어진 고금리 환경이 원리금 보장 상품의 금리를 높인 사실도 디폴트옵션 가입자를 초저위험 등급으로 몰고 간 배경으로 거론된다. 고용부에 따르면 2023년 말 기준 초저위험 등급의 1년 수익률은 4.56%다.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보수적 가입자의 심리에서 보면 4%대 수익률은 그럭저럭 양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조선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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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리금 보장 상품은 아예 배제해야”
예금 중심으로 흘러가는 디폴트옵션 시장을 바라보는 금융투자업계는 속이 쓰릴 수밖에 없다. 현시점에선 퇴직연금의 낮은 수익성을 확 끌어올리겠다는 제도 도입 취지가 무색해졌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정부가 지난 1년 동안 디폴트옵션 가입 동향과 수익률을 지켜본 만큼 앞으로는 제도 보완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고금리 상황에서 초저위험 상품이 1년간 4%대 수익을 냈는데, 같은 기간 중위험(10.91%)과 고위험(14.22%) 등급 수익률은 2~3배 더 좋았다”며 “하반기 중 금리 인하가 시작되면 (초저위험 상품과 그 외 상품 간) 수익률 격차는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증권업계는 디폴트옵션 도입 국가 가운데 한국과 일본을 빼면 원리금 보장 상품을 제공하는 국가가 없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영국·호주 등 우리나라가 모델로 삼은 퇴직연금 선진국 대부분이 실적 배당형 상품만으로 디폴트옵션을 꾸린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디폴트옵션에서 실적 배당형 상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TDF(Target Date Fund)는 은퇴 시기를 고려해 생애주기별로 주식·채권 등의 자산을 적절하게 배분하는 상품”이라며 “리스크 분산을 바탕에 깔고 설계된 상품이므로 은퇴 자금 보존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위험 등급도 ‘저수익-중수익-고수익’이나 ‘안정형-중립형-수익형’ 등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디폴트옵션에서 원리금 보장 상품을 배제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에서 원리금 보장 상품을 포함하도록 하고 있어 법 개정이 뒤따라야 한다. 은행 입김이 강력하다는 현실도 장애물이다. 어쨌든 고용부도 기획재정부 등과 함께 디폴트옵션의 수익률 개선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각계 의견을 경청하며 여러 대안을 살피고 있다”고 말했다.
전준범 기자(bbeom@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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