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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 (목)

[자작나무 숲] 톨스토이는 왜 不倫의 여주인공을 사랑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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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는 처음 읽으면 가정 파괴하는 불륜 소설

두 번째 읽으면 도덕 운운하는 사회의 위선과 이중성 비판

세상은 당장 심판을 원하지만, 문학은 커튼 뒤를 드러낸다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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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향한 그의 사랑이 끝난 거죠.”(He stopped loving me.) 프랑스 여배우 잔느 모로가 자신을 떠나간 연인(루이 말 감독)에 관해 남긴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프랑스인답다고, ‘쿨’하다고 생각했더니만, 실은 그녀 자신이 만만찮은 연애 편력자였다. 내가 자유로우면 상대도 자유로이 풀어주고, 내 사랑이 끝나면 그의 사랑도 보내주기 쉬울 듯하다.

푸시킨의 유명한 시 ‘나 당신을 사랑했소...’ 마지막 구절에 보면, ‘당신이 또 다른 이에게 사랑받기 바랄 만큼/ 당신을 사랑했다’는 역설이 나온다. 번역하기 까다로운 부분인데, 간단히 말해, 한때 내가 사랑했던 것처럼 이제 다른 남자도 당신을 사랑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이다. 숭고한 연애 정신의 표본으로 손꼽혀온 이 시가 반어적으로 읽히는 것 역시 ‘사랑했다’는 과거형 시제 때문이다. 사랑은 끝났다. 그러니 질투도 없다.

하지만 ‘사랑했다’는 고백이 반드시 사랑하는 마음의 종식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또 한 명의 낭만파 시인 레르몬토프가 격분해 이렇게 쓴다. “아니다. 그녀는 오히려 불행해져 마땅하다. 그것이 내가 이해하는 사랑이며, 나는 그녀의 행복보다 그녀의 사랑을 선호한다. 나 이후에 불행해짐으로써 그녀는 영원히 나와 함께할 수 있으리라....”

두 시인 차이는 식어버린 열정의 대응 방식에 있다. 실제 삶에서 푸시킨은 사랑의 승자였고, 레르몬토프는 패자였다. 돈주앙을 자처할 정도로 연애꾼이던 푸시킨은 열세 살 연하의 미인을 만나 가정에 정착했다. 사랑에 운이 없던 레르몬토프는 항상 상처받으며 그 상처에 복수하듯 또 정복을 일삼았다. 두 시인 모두 이른 나이에 결투로 생을 마감하는데, 푸시킨이 아내의 불륜 상대로 소문난 연적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큼은 아이러니다.

‘불륜’은 도덕률에 대한 배반이다. 꼭 사랑해서 결혼했거나 내내 사랑해온 부부가 아닐지라도, 혼인 상태에서의 불륜은 두 당사자 간 약속을 넘어 가족, 사회, 법, 때로는 신앙의 ‘신성한’ 서약을 깨뜨리는 행위에 해당한다. 그래서 사사(私事)임에도 공사(公事)다.

‘간통죄는 폐지되었으나, 불륜 여론 재판은 더 가혹해졌다’는 최근 신문 기사를 읽었다. 법적 처벌을 사회적 응징으로 대체하는 보상 심리 현상 같기도 한데, 실은 모순된 이중성이다. 학생들과 불륜 문학을 읽을 때도 비슷한 인상을 받는다. 그들의 일상은 불륜에 노상 노출되어 있다. 영화·드라마는 말할 것 없고, 문학 속 사랑은 거의 100%가 부적절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상당히 윤리적이다. 불륜에 가차 없다. 순수하고 이상적이어서, 또는 삶을 깊이 경험하지 못해서 그런지 모르겠다. 경험과 사유의 폭이 제한되어 있으면, 단죄도 쉽다.

가령 성공한 남편과 아들을 둔,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안나 카레니나(톨스토이 소설 여주인공)가 사랑에 눈이 멀어 가정을 파괴하는 설정 자체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겉으로만 읽으면, 그녀의 소위 ‘성공한’ 남편과 사회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매력 없는지, 그녀의 젊고 아름다운 생명력이 어떻게 억눌려 왔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사교계 질서(decorum)를 깨뜨리지 않는 한도 안에서 당시 사회가 불륜을 허용했음에도 안나가 그 룰과 타협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스스로 기만하고 싶지 않아서다. 사랑에 전부를 걸어서다.

톨스토이가 그려내려 한 것은 살아 숨 쉬는 개인 욕망과 그 위에 군림하는 제도적 계율의 불가피한 공생 관계였다. 둘 중 어느 한 편 손을 완전히 들어줄 수 없었던 그는 개인의 탈선은 징계하되(안나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도덕을 논하는 사회의 이중성에도 비난을 가했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안나를 한편으로 사랑했던 것 같다. 제도와 인습의 위선을 훨씬 더 혐오한 것은 분명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안나가 안타깝고 애처롭게 느껴진다. 대부분 불륜이 그러하듯, 행복에 비해 불행이 너무 길고, 사랑에 매달릴수록 그 사랑은 추해진다. 불행과 추함의 악순환에서 그녀가 택하는 마지막 길이 자기 자신의 소멸이다.

세상은 당장의 심판을 요구하지만, 문학은 그러지 못한다. 상황은 하나여도 사정은 각양각색이고, 다른 입장에 서면 달리 말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문학은 대신 이해를 구한다. 톨스토이는 소설 맨 앞에 성경 구절을 적어놓았다. ‘복수는 나의 것, 내가 갚으리라.’ 복수는 하나님 일이니, 인간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얘기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가. 신의 섭리와 인간 본성의 상호모순을 누구보다 명철히 꿰뚫어 본 톨스토이였기에 ‘안나 카레니나’ 같은 명작을 쓸 수밖에 없었던 거다.

조선일보

김진영 연세대 교수·노어노문학


[김진영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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