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오후 서울 중구 ‘공간채비’에서 청소년 성소수자 지원센터 ‘띵동’이 개최한 청소년 성소수자 장학사업 ‘크리스킴 스칼라십’ 1기 장학증서 수여식에서 수상자를 포함한 참석자들이 박수를 보내고 있다. 청소년 성소수자 지원센터 ‘띵동’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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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트랜스젠더 한은빈(가명)씨의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다.
고교 2학년 때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교내에 알려진 뒤 신체적·정신적 괴롭힘을 당했는데, 그때 경험이 한씨 꿈에 불을 댕겼다. 당시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를 열어달라던 한씨에게 선생님은 “다른 학생들도 성소수자를 보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찾아간 정신과 병원에선 “넌 진짜 트랜스젠더가 아니다”라고도 했다. 모두 한씨의 존재를 부정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한씨를 꺾지 못했다. 한씨는 오히려 “제가 겪은 부정적인 경험들을 다른 사람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성소수자 친구 중에 우울증을 비롯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이 꽤 많았다.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그는 의사가 되기 위해 매일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재수학원에서 입시 준비를 하고 있다.
“성소수자를 거부하는 사회 앞에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 도전하고 있습니다.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사람, 성소수자 공동체를 위해 의료인이 되고자 하는 오롯한 당신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장학생으로 선발했습니다.”
지난 20일 오후 서울 중구 복합문화공간 공간 채비. 단상에 오른 한씨에게 청소년 성소수자 지원센터 ‘띵동’의 정민석 대표가 장학증서를 수여하며 이런 메시지를 낭독했다. 한씨는 ‘띵동’의 ‘크리스킴 스칼라십’ 1기 장학생으로 선발돼 이 자리에 섰다.
크리스킴 스칼라십은 김아무개씨의 기부금을 종잣돈 삼아 1300만원 규모로 올해부터 처음 시작되는 장학사업이다. 청소년 성소수자를 자녀로 둔 김씨는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학업을 이어가거나 진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성 정체성 때문에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기부금을 내놨다.
“저의 도전을 응원해주시는 분이 많이 계셔서 힘이 나요. 응원해주신 만큼 열심히 노력해서 제 꿈을 꼭 이룰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한씨가 큰 목소리로 휴대전화에 미리 적어온 수상소감 낭독을 마치자, 단상 아래 둘러앉은 20여명의 청중 사이에선 힘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동안 띵동에서 청소년 성소수자로서의 삶을 함께 고민했던 상담사들과 친구·연인이 함께 한 자리였다.
지난 20일 오후 서울 중구 ‘공간채비’에서 청소년 성소수자 지원센터 ‘띵동’이 개최한 청소년 성소수자 장학사업 ‘크리스킴 스칼라십’ 1기 장학증서 수여식에서 장학금을 받은 한은빈(가명)씨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청소년 성소수자 지원센터 ‘띵동’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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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씨 외에도 이날 10명의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장학생으로 선정돼 각자의 꿈을 응원받았다. 미용사, 간호사, 입자물리학자, 양식 요리사, 바리스타, 일러스트레이터, 개발자, 네일아트 디자이너 등을 꿈꾸는 이들 모두에겐 저마다 다른 내용의 장학증서가 돌아갔다. “‘간지’(‘느낌’을 뜻하는 일본어) 작살 피부 미용계의 얼리어답터”를 꿈꾸는 범성애자 연호(별칭)씨에게 주어진 장학증서엔 “힘든 상황에서도 배움을 즐거움으로 삼고, 무기력하고 우울한 일상을 탈출하고자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탈가정 후 보육 시설에서 생활하는 동안 “동성애는 범죄”라는 말을 들으며 괴롭힘을 당했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은 연호씨를 격려하는 메시지다. “미용사가 되기 위한 공부가 어렵고 힘들 때 ‘포기할까?’가 아니라 ‘이 정도 수준은 돼야 공부할 맛이 나지!’ 이런 식으로 긍정적인 사고를 하려고 노력해요. 이게 어려움을 극복하는 저만의 방식이에요.” 연호씨가 말했다.
지난 20일 오후 서울 중구 ‘공간채비’에서 청소년 성소수자 지원센터 ‘띵동’이 개최한 청소년 성소수자 장학사업 ‘크리스킴 스칼라십’ 1기 장학증서 수여식에서 장학생들이 차례로 ‘1년 뒤 나의 모습’을 발표하고 있다. 청소년 성소수자 지원센터 ‘띵동’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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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수여식에서 장학생들은 ‘1년 뒤 나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이들은 “선한 의료 종사자”(동성애자 다준), “주변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타로 상담가”(트랜스젠더 아루), “퀴어 호텔리어”(트랜스젠더 이람)가 되어 있었고, 더 먼 미래에 “돈을 많이 벌면 절반 이상을 기부하고 싶다”(트랜스젠더 찬)는 포부를 전하기도 했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게 조금 힘들어서…. 1년 뒤에는 조금 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트랜스젠더 현(별칭)씨의 말엔 격려의 박수가 쏟아지기도 했다.
장학생들은 이후 장학증서에 첨부된 서약서를 차례로 낭독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을 계속할 것이며, 실패하더라도 낙담하지 않고 새로운 꿈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서로를 향한 큰 박수 속에 수여식이 끝났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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